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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니어 블로그

유능한 목사들과 성경 교사들의 숙고케하는 아티클들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돕기위해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주제들을 다룹니다.


 


2024년 07월 20일

교회

모더니스트의 주장과는 달리 J.G. 메이첸이 옹호한 역사적 기독교는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제5장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사회적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그리고 구원이 사회에 가져오는 결과를 반영하면서 5장을 마무리했는데, 복음은 가족, 지역 사회, 직장, 정부를 포함한 인간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2024년 07월 20일

구원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뒤흔들었고, 계몽주의의 낙관주의를 무너뜨리며 계몽주의 이후의 유럽을 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은 젊은이들이 사회적 행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사회적 복음”이라고 불렀고, 그 주요 설교자는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였다. 그는 뉴욕의 헬스키친에서 발견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 개선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적 행동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그들의 정의였다.
2024년 07월 06일

그리스도

J. 그레샴 메이첸이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였다. 메이첸은 헌신적인 성직자이자 예리한 학자로서 예수에 대한 교회와 학계의 비정통적인 견해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이와 동일한 오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2024년 07월 06일

성경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외치는 종교개혁의 싸움은 치열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가장 치열한 싸움이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순수한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질문의 기저에는 “누가 말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권위에 대한 질문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 않았다.
2024년 06월 29일

하나님과 인간

J. 그레샴 메이첸은 근대적 사고에서 하나님과 죄의식에 대한 개념이 상실된 것을 한탄했다. 메이첸에 따르면, 현대 자유주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에 대한 개념과 지식의 필요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신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종교를 매장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2024년 06월 29일

교리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윤리적 위기의 강도를 고려할 때, 교회는 교리를 배우기 위해 지금보다 배로 노력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계속 격려하고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2024년 06월 25일

기독교와 세속 철학

J. 그레샴 메이첸은 매우 귀중한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집필하면서 그가 “갈등의 시대”에 살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모든 인류는 죄를 지은 이후로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근본적인 갈등은 항상 사탄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있지만(창 3:15), 이 갈등은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메이첸은 자기 시대의 갈등을 물질주의와 영적 삶의 갈등으로 보았으며, 이것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된다.
2024년 06월 25일

미국 교회의 현대주의 갈등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기 교수진 중 한 명인 앨런 맥레이(Allan MacRae)는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 내내 진리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있어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끊임없는 투쟁은 1890년부터 1930년대까지 다소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2024년 06월 23일

자유주의: 전혀 다른 종교

올해(2023)는 J. G. 메이첸(J. Gresham Machen, 1881~1937)이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출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메이첸은 1906년부터 1929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을 돕기 위해 떠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약학 교수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