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원인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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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0일
염려의 결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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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원인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불안”의 세 번째 글입니다.

2년 전쯤, 어떤 여자 분이 내게 찾아와 “당신은 참 걱정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그걸 전혀 모르시네요”하고 말했다. 나는 미소지으며 교만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지? 나는 근심이 없어.”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충고를 숙고하기로 약속했다. 한달 쯤 후, 우리 교회의 장로들은 내게 긴급 안식년을 허락해 주었다. 그녀의 말은 모두 옳았다. 나는 실로 엄청난 불안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불안이 내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고, 다양한 층위에서 우리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는 직원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모두 은혜롭게 나를 대해주었다. 나는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안식년이 끝나갈 즈음, 나는 내가 불안을 경험하고 있는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확실히, 나는 그 질문을 건너뛰고 싶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수님이 내 염려의 궁극적인 해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망가뜨리고 있던 그 염려를 주님이 깨뜨리실 수 있다고 믿었고, 그분이 던지시는 공이 변화구처럼 흔들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무엇을 대상으로? 현재 나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나는 여전히 종종 찾아오는 염려와 씨름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안정을 찾는 방법도 배웠다. 염려를 다루기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그것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방정식의 중요한 부분이다. 

염려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걱정, 과민함, 불안감 및 두려움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때때로 염려는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경험된다. 종종, 위험, 불행 혹은 손실에 대한 예상과 연결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염려를 꽤 많이 본다. 사울의 아버지는 사울의 소재 파악이 되지 않자 불안해 했다(삼상 10:2). 시편 기자는 은유적으로 “근심스러운 수고의 떡을 먹음”에 관해 말한다. 이사야는 “불안해하는 마음”(사 35:4)을 가진 자들에 대한 말씀을 들려준다. 다니엘은 그의 영이 중심에 근심했다고 말한다(단 7:15).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했다”(눅 10:41). 심지어 사도 바울도 염려를 경험했다(고후 11:28). 그래서, 4천 만명의 미국인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염려와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종종 일정 수준의 염려와 씨름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염려의 근원은 인간의 타락에 있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세상을 죄와 비참 속으로 추락시킬 때, 그들이 그 다음으로 경험한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창 3:10). 두려움은 물론 염려의 요소들 중 하나이다.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가졌던 온전한 관계가 손상되자, 아담과 하와의 평안과 안정감은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실지 알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만약 금단의 열매를 먹는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2:17). 아마도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으로 두려워했다. 그들은 불안해 했다. 타락은 염려의 1차적인 근원이다. 

염려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걱정, 과민함, 불안감 및 두려움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때때로 염려는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경험된다.

연못에 바위를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타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염려와 관련된 다양한 파문 효과들이 있다. 우리는 이 효과들을 염려의 2차적인 근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락한 인류는 다방면으로, 다차원적으로 이 2차적인 근원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미국인들의 약 18% 정도가 뇌의 화학적 불균형으로 인한 불안과 씨름하고 있다. 그들은 임상적으로 진단된 불안 장애를 가지고 있다. 치료와 약물처방이 종종 필요하다.  

슬프게도, 그러한 곤경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기도를 좀 더 해봐” 혹은 “성경을 좀 더 읽어봐”라고 독려를 받곤 한다. 나는 (좋게 말해서) 이와 같은 충고들로 인해 자신들 스스로를 마치 2등 시민들처럼 느끼는 우리 교회의 지체들로 인해 마음 아파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 장애와 다른 만성 질환들 사이의 유사성을 식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개인들이 충분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문제는 우리의 통제 영역 밖에 있다. 만약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좀 더 해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불안 장애 진단을 받은 누군가에게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귀한 사람들에게는 진부한 말이 아닌, 연민과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 

염려에 기여하는 다른 2차적인 근원은 성격과 인생 경험 그리고 압박감이 있는 상황들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염려하기 쉬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성격의 측면들이 있을 수 있다. 혹은 당신이 어렸을 때 일어난 어떤 일로 인해 불안해 할 수도 있다. 당신의 부모님들 중에 한 분이 당신이 어렸을 때에 직장을 잃었다면, 직장 상사가 당신과 대화하기 원할 때 당신이 긴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염려의 2차적인 근원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의심할 것 없이, 염려의 가장 강력한 2차적인 근원은 바로 죄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죄책감과 수치심을 경험한다. 우리는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면서 불안해 한다. 야곱은, 자신이 두 번씩이나 속여서 빼앗은 적이 있는 자신의 형 에서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과 고통을 느꼈다(창 32:7). 다윗 왕은 고백하지 않은 죄로부터 뻗어 나오는 깊은 내적 갈등을 언급한다(시 32:3).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말한다(야 5:16). 분명히 우리의 치유의 일부는 죄와 관련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은혜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중요한 염려의 2차적인 근원은 연약한 믿음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25-34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음식, 의복)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그분이 우리의 가치를 공중에 나는 새들의 가치와 비교하시는 것을 주목해 보라(26절). 우리가 하나님께 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공급하실 것인지 아닌에 대해서 염려할 것이다. 예수는 또한 염려함으로 우리의 삶을 확장시킬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27절). 우리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가피한 죽음에 대한 염려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의복에 대해서 언급하신다(28절). 우리가 용모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러한 염려의 3가지 형태들 모두를 한 가지 원인과 연결시키신다: “믿음이 작은 자들”(30절). 

염려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주권, 선하심 그리고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지를 계시하는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강한 믿음을 갖는 것과 (비임상적으로) 덜 불안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있다고 예수는 가르치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영구적으로 염려를 제거할 수 있는 충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강한 믿음과 염려의 부재를 일치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졌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염려를 경험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일단 우리가 염려의 2차적인 근원들을 식별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만약 우리가 더 강한 믿음을 가졌었더라면 어떠했을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내 경우, 염려(불안)는 주로 교만과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의 위험한 조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하려 애쓰고 있었고, 도움을 구하지 않았으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책임의 무게에 의해 짓눌리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은 기꺼이 일을 덜 맡는 것을 요구했다. 

염려의 1차적인 근원을 이해하고 2차적인 근원을 식별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걸음을 내딛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 첫째, 그것은 우리가 염려하는 사람들에 대해 친절하고, 동정적이며, 인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염려는 복합적인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단순한 해결책들을 제안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는 사람들을 부주의하게 더욱 걱정하게 하거나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대신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해준다. 둘째, 염려의 1차적인 근원을 이해하고 2차적인 근원을 식별하는 것은 희망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창 18:14).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마 19:26). 그리고 우리도 우리를 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나를 포함한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염려를 다룰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신 그 방법 때문에 이 진리들을 점점 더 확신하고 있다. 당신이 만약 염려와 씨름하고 있다면,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하다.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시 121:2).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매트 라이먼
매트 라이먼
매트 라이먼(Matt Ryman) 목사는 미네소타 주의 미네아폴리스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하고 있다. 이전에 그는 플로리다 주의 대학장로교회(University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 목사로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