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의 결과들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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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의 결과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불안”의 네 번째 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추한 부분을 직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뇌우가 치는 날 현관 문 밖에서 발전기를 가동하는 것은 좋은 생각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두통은 이내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다른 어떤 것들과 마찬가지로, 염려 또한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염려를 뜻하는 신약 성경 그리스어 ‘메림나’는 “염려” 혹은 “걱정”으로도 번역된다. 우리 시대에 염려는 현실이고 도처에 만연해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도 그렇다. 염려는 상상의 시나리오나 실제적인 현실의 문제들 혹은 임박한 운명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지만, 염려가 지속되는 삶은 하나님과 이웃을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바대로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육체적인 효과들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고 질문하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염려가 건강한 장수의 비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두려움을 느끼거가, 침체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시작이다. 만성적인 통증, 장애 혹은 장기 질환과 같은 조건들이 염려를 유발할 수 있지만, 상황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 만성적인 염려는 비정상적인 신체 상태로 인해 고통, 질병 및 다른 육체적인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다.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졸은 우리의 몸 속에서 많은 필수적인 기능들을 수행한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이유로 그런 호르몬들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셨다. 이 호르몬들이 증가하면 우리는 달리진 생리적 조건들로 인해 –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 속도가 빨라지며, 혈관이 확장되어 우리의 뇌와 근육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고, 집중력이 향상되어 –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들을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호르몬들이 우리 몸의 시스템을 너무 자주 혹은 너무 길게 흐르게 되면, 여러 가지 질병들이 발생할 수 있다. 

점차적으로 과학자들은 염려와 부정적인 육체적 효과들 사이의 연결 고리들을 발견하고 있다.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염려는 건강한 성인들에게 심장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만성적인 정서적 스트레스와 불안은 위산 역류에서 과민성 대장 증후군, 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화기 계통의 소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높은 연령대와 더 많이 관련되는데, 노인들의 경우 불안과 연관된 신체적 조건들을 가속화시키는 동반 질환들과 저하 증상들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몸에 관한 연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죽도록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위험이 될 수 있다. 

관계적인 효과들

염려는 우리 몸에 분명하고, 측정 가능한 효과들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뿌리는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에 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대인 관계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염려의 관계적인 효과는 매우 강력하다. 임상적으로, 염려는 단기 기억, 집중력, 언어 및 공간 지각 능력, 독서 집중 시간 및 기타 많은 장애들과 연관되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염려는 사회 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염려는 거짓말에 귀를 기울인다. 시끄럽고 거슬리기까지한 그 거짓말들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장애들은 기능적인 측면들을 넘어선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정말 불안해 하는 사람을 심방한다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대화가 이어질지라도, 그것은 피상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지거나 타인이 살고 있는 어두운 근심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알고 지내던 나이가 지긋했던 한 여인은 심방 중에 끔찍한 사고와 진단에 대한 길고 장황한 설명을 낭독하듯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상세하고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에게 닥쳐올 수 있는 잠재적 고난의 섭리들을 열거했다. 그녀는 마치 그 효과들은 염두하지 않은채로 어둠의 생각들에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이 보였다. 그녀는 인생에서 실제로 슬픔의 순간을 직면해야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관계적 친밀함을 방해했던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그녀의 염려였다. 

염려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제들 속으로 우리를 침잠하게 한다. 우리는 안으로 움추러들고, 우리가 짊어지도록 의도되지 않았던 짐들로 인해 짓눌린다. 또한 우리는 그 짐들을 끌고 다니면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다시 퍼낸다. 잔느 마리 귀용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감은 심장을 조이고 시들게 만든다네…그것은 마주하는 대상들을 과장하고, 거짓된 색채를 입히며, 너무 무거워서 옮길 수조차 없는 짐을 그대에게 부과하지.” 염려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죄악된 부정적 렌즈로 채색시킨다. 확실히, 이러한 효과들은 사회적 관계와 타인들과의 건강한 교류를 방해한다.

그러나 그 효과들은 사회적 관계를 넘어선다. 안나 워링은 그녀의 기도-찬송 “아버지, 내 모든 삶은 내게 허락하신 분깃임을 압니다”에서 “달래고 동정할 수 있도록 스스로 느긋한 마음”을 달라고 간청한다. 염려는 우리에게서 이것을 앗아간다. 우리는 속에서 뒤틀려 여유롭게 쉬지 못한다. 대신에 우리 자신의 생각과 편견으로 소진되고, 우리 주변에 주어진 실질적인 기회들로부터 차단된다. 염려는 우리에게서 사회적 관계들을 앗아간다. 과연 그렇다. 또한 섬길 수 있는 능력과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린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사귐과 유용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연결고리들을 앗아간다. 불안감로부터 비롯된 관계적 고립은 결코 요행이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전술들 중에 하나이다. 친밀한 관계와 공동체 참여가 없는 신자는 의심과 절망을 위한 쉬운 표적이다. 염려의 관계적, 영적인 효과들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적인 효과들

염려의 영향력은 영혼 속에서 진정으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만약 염려가 우리의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염려는 종종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의심하거나 그것에 대한 전망을 잃을 때 일어난다. 어머니로부터 이제 막 젖을 땐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 대신에, 우리 영혼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 일들에 관해 불안함 속에서 동요하고 집착한다(시 131:2).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쉴 수 없다.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우리가 염려할 때 특별히 그렇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력이 아닌 오직 현실을 위해 은혜를 약속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걱정이 아닌, 매일 아침을 위한 새로운 긍휼을 약속하신다. 다시 한 번 워링은 이렇게 말한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모든 길에는 찔레 숲들이 있다네; 모든 운명에는 십자가가 있고, 기도에 대한 간절한 필요가 있다네; 그러나 당신께 의지하는 낮은 마음은 어디서나 행복하여라.” 염려의 영적인 위험을 인식하는 것은 세상에 어렵고 두려운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용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슬픈 모습은 경건함에 끌리기보다는 물리치기 쉽다. 기쁨의 정신과 자유함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모습은 그분의 멍에가 쉽다는 것을 세상에 분명히 드러낸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믿지 않거나 우리의 목자가 선한 분이라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종종 염려한다. 때때로 어두움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며, 그런 상황은 하나님이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영적인 싸움의 순간이다. 때때로 진리는 머나 먼 희망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것이 바로 염려가 우리의 영혼에 그렇게 위험한 영향을 미치는 이유이다. 염려는 하늘 아버지 곧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분을 의심하게 한다. 염려는 거짓말에 귀를 기울인다. 시끄럽고 거슬리기까지한 그 거짓말들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와 세상 속에서 그분이 전능하시지도, 전지하시지도, 무소부재하시지도 않으신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지할 때, 그러한 거짓말들을 전하는 통로가 된다. 염려는 언제나 진실을 짜내려고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거짓말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줄을 선다.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들에 대한 거짓말들은, 우리를 도우시는 오직 한 분이신 그분을 향한 의심을 일으키려고 할 때 가장 파괴적이다. 염려와 그것과 함께 오는 거짓말들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아마도 엘라인 타운센드가 “주님, 염려하지 않고, 당신과 저의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저를 교훈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과 함께 나누는 이 평화에 대해 감사하나이다.” 

결론

이 모든 효과들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염려하지 않도록 하자. 그것들은 우리가 걱정을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실 우리는 모두 걱정을 정당화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때때로 초조해 할 수 있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우리는 자녀들을 향한 염려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걱정을 안전과 도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우리는 건강에 대한 초조함을 청지기직에 대한 요구로 정당화한다. 또 어떤 때에는, 우리가 품고 있는 걱정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특정한 위기들을 선택하는데,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나 말기 질환이 가져올 수 있는 영향을 묵상함으로써 그 걱정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친구들에게까지 우리의 염려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에 파괴적인 어떤 것은 반드시 물리쳐져야만 한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좋은 건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잠재력을 가진 어떤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항복하거나, 휴전을 선언하거나, 협상할 이유가 없다. 어떠한 논리적 명분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걱정을 분별, 관심 혹은 심지어 사랑이나 신앙적 독실함과 동일시하곤 한다. 그런 것들의 열매는 경건한 행동과 신뢰이다. 그것들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염려의 열매는 다양한 층위에서 죽음을 가져온다.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하자. 대가가 너무 크다. 그것과 더불어 전투를 벌이자. 그 전투는 결코 짧지도, 전선이 명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전투는 또한 의사, 목회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도움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선한 싸움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레베카 벤두드월드
레베카 벤두드월드
레베카 벤두드월드(Rebecca Vandoodewaard)는 Reformation Women: Sixteenth-Century Figures Who Shaped Christianity’s Rebirth 및 어린이들을 위한 배너 보드 북 시리즈를 포함한 많은 책들의 저자이다. 그녀는 미시간에 있는 그랜 래피즈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