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란 무엇인가?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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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란 무엇인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불안”의 두 번째 글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불안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보건 기관에 따르면, “불안 장애는 미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신 질환”이라고 한다.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최근 몇 십년 동안 심지어 청소년들 가운데서도 불안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2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점들 중 하나인 <반즈엔노블>은 불안을 다루는 책들의 판매가 25% 급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이 모든 일들은 최근의 판데믹 상황 이전이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불안은 지난 해보다 더욱 증가했다. 

나는 누군가 내 아버지에 대해 “오, 그는 그저 걱정만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늘 걱정을 달고 사셨다. 할아버지가 가업을 매각하신 이후, 아버지는 밑 바닥에서부터 사업을 다시 시작하셨다. 시간과 관심을 소진시키는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크게 성공했지만, 그 과정은 또한 매우 큰 스트레스를 동반한 것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여섯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관심의 맨 위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여섯 자녀들을 가진 목사로서, 아버지의 아들이며 나 또한 내 자녀들을 위해, 내 양무리들을 위해, 그리고 종종 순전히 내 책임의 무게 때문에 염려와 싸우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염려는 심각한 문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25)고 명하셨다.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권면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 이러한 구절들은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거예요”라는 말처럼 그저 위로를 주는 조언 정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말씀들은 성경적인 명령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어기는 것은 죄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염려를 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로서 특정한 종류의 합당한 염려를 경험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다른 역경들에 더하여,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고 썼다. 여기서 “염려”로 번역된 헬라어는 바울이 (위에서 인용된) 빌 4:6에서 사용하는 “염려하다”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묘사하듯이, 죄스러운 염려가 아닌 사랑의 마음이 담긴 염려이다. 

확실히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염려의 대조적인 형태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적절하고 옳은 염려이지만,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의 뜻에 대비되는 것이다. 실제로 신약 성경은 두 종류의 염려들 모두에 대해서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 (분쟁이 없도록) 서로에 대한 ‘염려’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고 썼을 때(고전 12:25) 사용했던 동일한 헬라어 동사를 빌립보서 4:6(또한 마 6:25)에서도 사용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그의 동역자들 중 그 누구보다 더 그들을 “진실히 염려할 자”로 디모데를 추천한다(빌 2:20).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염려의 대조적인 형태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적절하고 옳은 염려이지만,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의 뜻에 대비되는 것이다.” 

우리의 죄악된 염려들 중 대부분은 적절한 염려들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들을 돌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직무들을 성취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염려해야 한다. 우리의 질문은 언제 이 적절한 염려들이 죄악된 염려들로 바뀌며, 언제 경건한 염려가 불경건한 걱정으로 변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한 판사가 음란물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유명해진 것을 염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 판사는 그것을 정의하기보다 이렇게 일갈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보면 압니다.” 우리는 죄악된 걱정 혹은 염려가 무엇인지를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의 표지들 – 진땀 나는 손바닥, 두근거리는 심장, 긴장을 풀거나 침착할 수 없는 상태,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 수면 부족 및 많은 다른 증상들 – 을 안다. 그러나 무엇이 죄악된 염려를 죄악되게 만드는 것일까?

좋은 출발점은 누가복음 10:38-42에 나오는 예수님과 마리아 그리고 마르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있고, 마르다는 손님을 대접하느라 분주하며, 식사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분의 발치에 앉아 있다. 마르다는 몹시 화가 나서 마리아더러 그녀를 좀 도우라고 말씀해 주실 것을 예수님께 간청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하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마르다는 좋은 일에 사로잡혀 최고의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예수를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으나 정작 예수 자신에게는 집중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죄악된 염려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에게서 떼어 내고, 여타의 합법적인 염려들에 의해 사로잡힌다. 다시 말해, 죄악된 염려는 세상적인 근심과 책무들을 그리스도보다 위에 둔다. 그것들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는 두 번째 자리일 뿐이다. 

찰스 스펄전은 마르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녀의 실수는 그녀가 손님을 대접했다는 것이 아니다. 종의 조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것이 된다. 그녀의 실수는 ‘많은 섬김’으로 인해 주의가 분산되었으며, 주님을 까마득히 잊어버린채 오직 손대접만 기억했다는 것이다.” 40절에서 “분주한지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로부터 멀어지다, 우리의 주의를 다른 무언가로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어떤 헬라어 사전이 번역하듯이, “과중한 무담으로 너무 바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죄악된 근심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 결과이며, 부당한 짐들을 짊어지도록 인도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고 권면하는 이유이다. 당신의 세상적인 걱정의 짐들이 늘어날 때, 염려를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강을 맛보기 위해 감사 뿐만 아니라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바라보라. 

죄악된 염려는 잘못된 것들을 추구하고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뗀 결과이다. 예수는 염려에 관한 고전적인 성경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마 6:33). 문제는 우리가 종종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리 자신만의 작은 왕국을 세우는데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과 돈 혹은 하나님과 세상적인 목적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24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를 죄악된 염려로 인도할 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 갈수록 세속화 되어가는 우리 시대에, 염려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죄악된 염려는 또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의 결과이다. 예수는 걱정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마 6:30)이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고 믿음으로 산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의 힘이 아닌 믿음의 대상에 의존한다; 그렇다할지라도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언제나 성장할 수 있다. 예수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들을 돌보시는지를 상기시키시며, 그의 제자들은 그 새들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신다(2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들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입에 먹이를 떨어 뜨려 주시기를 기다리면서 입을 벌리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 심지어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하신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작동하도록 창조하신 방식이다. 심지어 걱정은 종종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바대로 일하지 못한 실패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의 책무들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위해 준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며, 특히 미래를 위해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요셉이 다가오는 기근을 대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창 41장; 또한 잠 6:6-8; 16:9; 눅 14:28-32 참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손길로 우리의 미래를 붙들고 계심을 신뢰하며,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감당하라고 부르신 일에 신실하라는 부르심이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2). 이 말씀은 지나치게 바쁘고 분주한 우리의 세상에 대한 좋은 기억 매체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백성들을 다른 책무들과 다른 소명들로 부르신다. 그러나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바울은 그 고백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의 나라를 추구하도록 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것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윌리암 바클레이
윌리암 바클레이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ey) 박사는 Sovereign Grace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에 있는 리폼드신학교의 신약성서 겸임교수이다. 그는 The Secret of Contentment과 Gospel Clarity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