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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8월 04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방법
2023년 08월 09일용기와 친절로 복음을 전하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교만과 겸손”의 열일곱 번째 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 행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원래 “제자” 또는 “그 도(the Way)”의 사람들이라고 불렸지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행 11:26). 이 단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래 비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 세계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구별하여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모든 신자는 복음 전도자이다. 기독교인으로 알려진다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에서 벗어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을 가리키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구원의 소망을 설명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빛나서 이런 어두운 세상에서 사람들을 비출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마 5:14-16). 우리의 행동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와도 관계를 맺는 방식은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방식으로 눈에 띄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지 궁금하게 만들 것이다.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전도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참된) 기독교인들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조만간 그들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는”(벧전 3:15)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언제 복음을 나눌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따라서 그런 기회가 생길 때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 왜 사람들이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 요소를 미리 알아야 한다.
출발점은 간단하다. 세상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리 각자에게도 무언가 절박하게 잘못된 것이 존재한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면 실제로 문제가 무엇인지 논의하고 그런 후에 해답을 모색해 볼 기회가 제공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이 두 가지 사실 앞에 그들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그런 생각들이 질문에 얼마나 잘 맞설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게 하고 또한 자연스럽게 성경의 답변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언제 복음을 나눌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이런 답변은 창세기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방식으로 시작된다. 모든 인간에게는 한 저자가 “에덴의 메아리”라고 부른 것이 있다. 이것은 상황이 항상 오늘날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심오한 의미이다. 하지만 낙원은 지옥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담의 죄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인간을 변질시켰다. 그러나 그때도 희망은 있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써(창 3:15),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실 구세주를 가리키고 계셨다. 이 약속은 성경 전체 메시지를 위한 줄거리를 설정했다.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분의 완전한 삶, 대속적 속죄, 부활 및 즉위를 통해 구원과 회복을 가져오실 것이다.
이런 답변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도 중요하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매우 다른 두 사람에게 같은 복음을 설명하신 방식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3장에서의 니고데모에 대한 그분의 접근 방식은 다음 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 관계를 맺은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은, 히브리어 성경은 알지만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독선적인 바리새인에게는 직설적이셨다. 이에 비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분의 접근 방식은 매우 달랐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는 단순한 요청으로 시작하셨고, 이후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 될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이 그런 대화를 하셨던 진정한 의미는 대화의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서 이런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우리가 믿음의 근거를 제시할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벧전 3:15-16). 복음의 대화(그리고 토론)는 우리에 대해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분의 온화함과 겸손,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향한 사랑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는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한다.
이런 말을 쓴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어떤 종류의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다락방에서 재빨리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의 용기는 허세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추궁당했을 때 베드로는 용기를 잃고 구주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하지만 오순절 날에 회복되고 복권된 이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있는 군중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던 죄인인 그가 구속의 놀라운 모든 충만함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동일한 사랑이 그를 강권하여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있어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아는 것보다 예수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할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은 『사람 낚는 기술(The Art of Man-Fishing)』이라는 복음 전도에 관한 책을 썼다. 다른 사람과 복음을 나누는 것은 시행해야 할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 개발해야 할 기술이며 이를 수행하는 유일한 방법은 연습을 통해서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