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방법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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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방법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교만과 겸손”의 열여덟 번째 글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은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계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결하게 요약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의해 성경에서 연역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혹은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자 하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믿고 행해야 할 것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그분의 가르침을 성경으로 축소하셨고 “더 확실한 예언”(벧후 1:19)인 성경을 의지할 수 있게 하셨다. 인간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라고 믿는 것들 대신 말이다.  

다른 어떤 것도 성경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필수적이다. 성경이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교회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면(딤후 3:15~17), 하나님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필요한 모든 영적 부요함이 담겨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를 배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두 가지 기본 도구를 명시해주고 있다.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의한 진술과 추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원, 권위, 내용, 위엄 면에서 독특하지만 해석할 때는 우리의 접근 방식을 반영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가정하는 것 모두에 귀를 기울일 때에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평범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먼저 명시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확실한 길인 것 같다. 아이들에게 “천둥번개가 치면 밖에 나가지 마라” 또는 “마당 청소를 해라”라는 명시적인 진술은 의미를 놓칠 여지가 적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진술 뒤에는 몇 가지 필수적인 암시가 있다. 우선, 아이들이 내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말 뒤에 함축되어 있는 아이들과 나의 관계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천둥 번개가 치는 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나가서는 안 되며, 가족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마당을 청소해야 한다. 두 경우 모두 근본적인 전제는 내가 그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릴 권한과 전문성, 둘 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불완전하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많은 것을 가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암시하는 가정이 없다면 의미가 상실된다. 이러한 추론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선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방법을 능가한다. 하나님은 완벽한 배려와 지혜로 우리에게 할 말을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함축된 모든 것을 아신다. 따라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와 같이 명시적으로도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마 22:32)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냐고 하신 것처럼 암시적으로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가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데 있어 동등한 힘을 가진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의한 추론에 도달하지 못함을 보시고,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29절). 사두개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34절).

필연적 추론은 성경 본문의 기초가 되는 가정, 즉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가정을 끌어낸다. 따라서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 25:4)는 말씀은 하나님이 가축이든 사람이든 노동에 대한 삯을 주는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가정하게 한다(딤전 5:18).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축을 위하여 염려하심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신(고전 9:9)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신약성경에 인용한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서 추론된 원칙을 따르고 있다. 시편 16편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것은 다윗은 무덤에 묻혀 썩음을 당했기 때문이다(행 13:35~37).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마 2:15).

이러한 예는 우리가 무시해버릴 만한 수수께끼가 아니다. 성령님만 아시는 난해한 원리도 아니다. 성경 저자들의 사고 과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처럼 생각하도록 초대받았다. 단순히 진술 자체만 보지 말고 성경의 진술 뒤에 있는 가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기 원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열린 눈과 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선하지도 필연적인 결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밀랍 코처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꿀 수는 없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해서(눅24:27), 레바논 나무로 지은 솔로몬 왕궁의 모든 계단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신성한 위격 사이의 영원한 질서에 따라 하나님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성령에 의해 일하시기 때문에, 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엡 2:18). 또한 이것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하나님(행 20:28)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받고 죽을 수 없으나 인간이 되셔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며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 한 인격 안에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단지 성경에 적합한 선한 결론 그 이상이다. 이 결론 없이는 성경의 다른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

성경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가정하는 것 모두에 귀를 기울일 때에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평범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좋은 소식은 성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눅11:13), 성령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이다(눅24:45). 여기에도 성경이 가정한 사고 과정을 추론하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에는 성령님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눈을 밝히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만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의한 명시적인 진술과 추론에 다다를 수 있다. 부모가 창문을 깨지 말라고 특별히 말한 적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부주의로 창문을 깨는 아이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기 원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열린 눈과 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말씀과 예에서 배우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것들을 배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은 이것을 간과하지 않고 폭 넓게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만 그 이상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내적 조명이 말씀에 계시된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요 6:45). 말씀 안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가르치시는 성령님께서 말씀 안에서 진실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고전 2:12~14).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말씀으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고 계신다 (고후 4:6).

성경의 모든 것을 늘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때때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국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요 10:27).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것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 배경과 주변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인식하고 있는가?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라이언 M. 맥그로
라이언 M. 맥그로
라이언 M. 맥그로(Ryan M. McGraw) 박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위치한 그린빌 장로 신학 대학교의 Morton H. Smith 조직신학 교수이자 학장이며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의 강도장로이다. 그는 『The Day of Worship, The Ark of Safety: Is There Salvation Outside the Church?』, 『 By 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등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