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가시와 엉겅퀴를 견뎌 내라

2026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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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의지의 속박”의 열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요 14:6 참고). 사실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매우 본질적인 측면이므로, 하나님은 “충신과 진실”(계 19:11)이라는 칭호로 불리신다. 그분은 시간과 환경이 변덕스럽게 흘러가는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시다(민 23:19 참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자신의 피조 세계 가운데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신다(시 19:1–6 참고). 그분은 진리를 사랑하시며(렘 10:10 참고), 언제나, 모든 방식으로 진리를 말씀하신다(시 119:160 참고). 하나님 자신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요 본질이시며,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시다(요일 5:6,20,21 참고).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근본적이고도 본래적인 진리이시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고, 모든 진리 안에 있는 진리이시다. 하나님은 만물의 진리, 곧 참된 존재의 토대이자, 만물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근거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진리와 윤리적 존재, 모든 규칙과 법칙의 이상이자 원형이시다. 만물의 본질과 실상은 그 빛에 비추어 판단되고, 그분을 본받아 형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를 아는 지식의 근원이자 원천이시다.”

이와 마찬가지로, 키스 매티슨(Keith Mathison)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하나님 중심의 진리관은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무언가가 참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거나 창조하시거나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조에 따르면,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리를 계시하신다.

“첫째,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신다. 이 우주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가장 훌륭한 책과 같고,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은 글자와 같아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0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깊이 묵상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아무것도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고도 신적인 말씀으로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리신다. 즉, 현세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만큼 우리에게 알리신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확실하고 분명하며 객관적이다.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에 나타난 일반 계시와 그분의 영감된 말씀에 나타난 특별 계시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자유롭게 되도록, 이 두 가지 진리의 통로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신다. 그러므로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철학, 과학, 기술에 존재하는 모든 참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이고도 무오한 계시가 발현된 것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에 따르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주후 354–430)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라는 경구적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책자 『기독교 교양』(On Christian Doctrine)에서, 하나님의 진리 계시(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지닌 무오성과 그 계시에 관한 인간의 해석이 지닌 오류 가능성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다룬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확실하고 분명하며 객관적이다.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에 나타난 일반 계시와 그분의 영감된 말씀에 나타난 특별 계시를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기독교 교양』(On Christian Doctrine)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저작인 동시에 후기 저작이기도 하다. 391년에 주변의 강권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책은 아마도 그가 그렇게 집중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던 시기에 일기 형식으로 남긴 수수께끼 같은 기록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394년경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창세기, 로마서, 갈라디아서에 관한 방대한 주해 작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시편에 관한 기념비적인 연구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는 그가 처음에 남긴 기록들을 오래도록 남을 만한 더 충실한 저술로 발전시키기에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그는 사역 초기에 지체 없이 『기독교 교양』의 처음 세 부분을 집필했다.

그러나 397년 무렵 어느 시점에 그는 글쓰기를 멈추었다. 목회 활동에 긴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인지, 다른 여러 집필 작업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초기 저작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그 원고는 그의 서재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 원고를 남겨 둔 채 세월이 흘러 아우구스티누스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에 접어들었고, 그 무렵에야 낡고 먼지 쌓인 원고를 다시 꺼내 오래전에 쓴 내용을 조금 다듬고, 마지막 부분을 덧붙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바를 발견하고”, 나아가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올바로 전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자 했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설교자와 교사를 위한 지침서 정도로만 여겼다. 물론 이 책은 분명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진리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방식을 분명하게 밝히는 선언문이자, 그 진리를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하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외침으로 보았다. 이는 타당한 평가이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그의 저작들 가운데 『고백록』(Confessions)이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만큼 중요한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

이론가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그는 방대한 고전 학문에 관한 지식과 풍성한 영적 통찰을 결합하여,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을 체계적으로 풀어 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뛰어난 학문적 배경을 갖추고 있었으나, 상아탑에 갇혀 있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는 정통 신앙(orthodoxy)과 정통 실천(orthopraxy), 곧 바른 믿음과 바른 실천을 실제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라틴어 원제는 ‘De Doctrina Christiana(데 독트리나 크리스티아나)’로, ‘기독교 교리(On Christian Doctrine)’라고 쉽게 옮길 수 있지만, ‘기독교의 가르침(On Christian Teaching)’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은 교리 자체보다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분별력을 발휘하여 지혜롭게 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비참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런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하도록 안내하는, 일종의 해석학 지침서이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확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선하고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리가 어디에서 발견되든 그것이 자신의 주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은 타당하다. 우리는 진리를 두려워하거나 진리에 대해 변명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진리는 모든 비난을 견뎌 내고, 모든 도전에 굳게 맞설 수 있다. 때가 되면, 진리가 스스로 그 가치와 진실성을 입증할 것이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경험에서 얻는 확신들이 진리의 확실성을 입증할 것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는 늘어날 수는 있어도 끊어질 수는 없으며,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듯 언제나 거짓 위로 떠오른다.” 또는 셰익스피어가 재치 있게 말했듯이, “결국 진실(진리)은 드러나는 법이다.”

진리는 단순히 사람이 만들어 낸 도덕적 개념이 아니다. 또한 사람이 만들어 낸 어떤 윤리 체계를 주관적으로 적용한 것도 아니다. 진리는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곧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방식을 반영한다. 곧 진리는 실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이다(롬 1:18–32 참고).

진리는 객관적이고 일관되며 균형 잡혀 있다. 진리는 아름답고 실제적이다. 진리는 선하고 유익하다. 진리는 다가갈 수 있고, 알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진리는 신뢰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하며,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믿을 만하다. 그것이 세상의 실제 모습과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진리 외에는 지혜가 없다. 진리는 영원하지만, 진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지혜의 첫 열매 중 극히 일부만을, 한없이 높고 넓고 깊은 진리의 겨우 몇 조각만을 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저 합리적이고 분별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놀랍도록 풍성한 열매를 맺고 유익한 결과를 낳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할 때, 그것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삶에 갑자기 불이 켜지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정의가 실현된다. 소망이 이루어진다. 신뢰가 형성된다. 사랑이 확증된다. 자유가 보호된다. 진리는 철학자에게 유익한 만큼이나 과학자에게도 유익하다. 진리는 남편에게 매우 중요한 만큼이나 의사에게도 더없이 중요하다. 진리는 변호사의 일에 필수적인 만큼이나 예술가의 작업에도 필수적이다.

온통 분열되고 깨어진 이 세상에서 악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애정을 차지하려고 사랑과 맞서 싸우는 가운데, 진리는 선의 무기고에 없어서는 안 될 무기이다. 진실함과 명예와 용기가 모두 진리에 달려 있다. 실로 진리가 없다면, 시민 사회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가 선언한 대로, “진리는, 길고 깨끗하며 명료하고 단순하며 부인할 수 없고 반박할 수 없으며 곧고 빛나는 ‘선’이다. 그 선을 경계로 한쪽은 검고, 다른 한쪽은 희다.”

가정과 공동체에서든 사회와 국가 사이에서든, 어떠한 방해나 속박도 받지 않는 진리야말로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관계를 세우는 유일한 토대가 된다. 지혜는 언제나 진리를, 온전한 진리를, 오직 진리만을 기꺼이 받아들여 왔다.

진리는 논쟁을 통한 검증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진리를 찔러 보라. 그것을 파헤쳐 보라. 탐구해 보라. 드러내 보라. 거꾸로 뒤집어 보라. 안팎을 뒤집어 보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라. 가장 혹독한 조건 속에 놓아 보라. 진리는 끝까지 견뎌 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스스로 참됨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다.

“의견은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

그러나 진리는 태양보다 오래 남으리니.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가장 오래된 것을 붙들라.”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가이 워터스

가이 워터스

가이 워터스(Guy Prentiss Waters) 박사는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의 James M. Baird Jr. 신약학 교수이자 미국장로교의 강도장로다. 그는 How Jesus Runs the Church 및 The Life and Theology of Paul 을 포함한 여러 책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