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과 이혼
2026년 05월 23일
성적 거룩함을 추구하라
2026년 05월 23일몸이 들려주는 이야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성윤리”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2024년 말, 낸시 메이스(Nancy Mace) 하원의원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생물학적 남성이 미국 의회의사당에서 여성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매우 공개적인 운동을 벌였다. 성폭행 생존자인 메이스는 진보주의의 최신 흐름에 맞서, 의심할 여지 없이 용기 있는 입장을 취했다. 그녀는 원치 않는 남성과 한 공간에 있게 된 여성이 실제로 얼마나 취약한지를 이해한다. 메이스의 반대는 남성과 여성의 현격한 차이가 사회가 수호해야 할 신성한 경계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메이스가 취한 입장에는 모순과 한계가 있다. 그녀가 문화적으로 더 진보적인 공화당원을 자처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무너뜨리는 문화적 세력인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로비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의 요구를 인정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T, 곧 트랜스젠더를 제외한 LGB를 인정하는데, T나 LGB 모두가 공통된 기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간과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둘은 모두 인간의 텔로스(telos), 다시 말해 신체를 통해 구현된 목적을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T는 개인에게 부여된 신체라는 차원에서 텔로스를 거부하고, LGB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라는 차원에서 텔로스를 거부한다. 물론 우리는 T에 반대하는 모든 이를 환영해야 한다. 다만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LGB에도 반대해야 한다.
이런 일관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성경의 선언에 담긴 도덕적 질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이다(창 1:26,27 참고).
성경에 따르면, 몸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경은 인간이 성별을 지닌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묘사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목적을 지닌 세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성에 따라 목적을 지닌 존재요 원형으로 그려진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주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이유는 본질적으로 이 신적 명령을 이루는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본래 서로 구별된 두 가지 신체 형태가 전제된다. 본질적으로 성경의 첫 장들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질서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창조 세계를 보여 준다.
몸의 설계는 창조 질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창조 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를 더 면밀히 살피면, 그 창조에 담긴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의 설계는 신체로 구현된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통해 깊고도 아름다운 창조 이야기를 들려준다.
몸과 자아: 창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 있는 질서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며, 서로를 위하도록 설계하셨다. 남성과 여성은 함께 사회 질서를 세우도록 촉진시키는 토대가 되며, 이것은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에 소명을 부여하는 창조의 신적 양식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개인으로서 우리에게 행위 주체성, 곧 그분의 창조 세계 안에서 행동하고 경험하며 누리는 능력을 주신다. 우리의 몸은 음식을 먹는 것부터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 전문적인 직업 활동에 종사하는 것, 신체 활동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부부 관계를 통해 육체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삶의 기쁨을 맛보게 해 준다. 이처럼 우리가 신체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이 한낱 그릇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일깨워 준다.
몸과 관계성: 한편 우리 개개인은 획일적이거나 아무 차이 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표현되며, 관계성을 지닌 존재로 설계되었음을 드러낸다. 몸은 관계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처럼 몸의 상보성은 남성과 여성에게 결혼 안에서 완성되는 고유한 역량을 부여한다. 이와 같이 몸의 상보성이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부여하는 고유한 본성과 역량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생식 능력이다. 그리하여 가정은 사회 질서의 초석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개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관계성과 사회의 이야기까지도 들려준다. 창조 질서에는 몸을 지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사람, 남성과 여성의 연합, 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명의 확장이 포함되며, 하나님은 이 질서를 보시고 ‘좋다’고 선언하신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다른 이를 위해 설계되었다.
몸과 사회: 건강한 문화는 견고한 가정에 달려 있는데, 그런 가정은 개개인이 몸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 결속하는 결혼을 토대로 세워진다. 이런 결속을 길러 내고 유지하는 능력은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경계를 무시할 때,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참된 번성을 이루는 길에서 벗어나고 만다. 오늘날 나타나는 출산율 저하와 결혼 제도의 약화는 창조 질서가 뒤집혔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 역사적으로 신학자들과 정치 철학자들은 결혼을 정치보다 앞선 가장 중요한 제도이자 정치 질서를 안정시키는 기반으로 인식해 왔다.
이렇게 결혼과 가정과 사회의 연결고리는 제5계명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 계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모에게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이어지는 질서 정연한 권위를 강조한다. 여러 가정들이 이와 같은 본을 그대로 실천할 때, 사회가 건강해지고 번영하는 틀을 갖출 수 있다. 그러므로 몸과 결혼과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설계를 존중하고 지키는 것은 신학적 명령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의 몸이 사회를 만든다.
개인적 차원과 관계적 차원, 사회적 차원은 모두 우리가 신체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 안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고 통합되어 있다. 우리의 개인적·관계적·사회적 역량은 개념상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 존재하지는 않는다.
몸의 도덕적 이정표
신체적 성별의 차이에 관한 논리는 성경적 성 윤리의 도덕적 틀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성경에서 성적 관계를 규범하는 맥락은 본질적으로 몸에 담긴 설계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바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몸을 서로 다르면서도 보완적으로 빚으셨다. 이 설계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목적을 전달하며, 우리의 몸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몸의 자연적 설계를 존중하는 것은 성경적 성 윤리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몸의 구조, 특히 생식 능력이 어떤 성적 행위가 합당하고 어떤 행위가 부도덕한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본성과 목적이 신체에 구현된 실재이다. 이 목적은 결혼과 가정생활 안에서 완성되는데, 그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보완적 연합은 생명을 이어 가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성경적 성 윤리는 인간의 몸이 특정한 설계와 분명한 목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이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성경적으로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본성이 어떠하며 무엇이 그것을 완성시키는지를 참되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선을 경험하려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인식하고, 피조된 우리의 본성을 받아들이며, 그 본성에 어울리게 살아가야 한다. 피조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는 무엇이든지 결코 참된 ‘선’이라 불릴 수 없다.
어떤 것의 목적 또는 존재 이유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올바로 발전하고 완성되도록 이끄는 도덕 원리를 세울 수 있다. 이 원리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 이 원리들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설계에 자신을 맞추고,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의도하신 선을 경험하게 된다.
의도적인 모호함에 맞서라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설계를 분별하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인일 필요는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비그리스도인 사회에서도 이런 설계를 존중한 사례들이 가득하다.
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몇몇 기독교 신학자들이, 죄가 자연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너무도 철저히 부패시킨 까닭에 오직 특별계시만이 자연을 올바로 해석하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여기에 일부 동의하지만, 동시에 문제점도 있다고 본다. 이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존재/당위” 딜레마, 곧 우리의 본성에 관한 사실들에서 그 어떤 규범적 진술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생각을 무심코 받아들이게 된다. 이 딜레마는 윤리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경이 일반계시(자연)에 대한 확정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 결함이 있다고 해서 모든 진리를 전혀 분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 18-20절에서 확언하듯이, 자연에는 성경의 도움 없이도 알 수 있는 도덕적 의미와 신적 표지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비그리스도인들이 트랜스젠더 운동의 부조리를 인식할 때, 그들은 불완전하게나마 창조 질서의 참된 의미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없이는 자연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동성 결혼처럼 자연을 거스르는 불합리한 해석들이 기독교적 해석만큼이나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 입장은 사실상 목적론적 자연관이라는 토대를 허무주의에 넘겨주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도덕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시사하는 셈이다. 이것은 공적 윤리에 치명적이다.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식론이 아니라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본성상 불의로 진리를 막지만, 그런 억압은 진리의 존재 자체를 없애거나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워 버리지 못한다. 로마서 1장 19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다시 말해, 죄가 인간의 이해를 왜곡하기는 하지만, 자연을 이해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창조에 내재한 도덕 질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는 못한다.
결론
2021년, 미국 교통부 장관 피트 부티지지(Pete Buttigieg)는 자신과 그의 ‘남편’이 대리모 출산을 통해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두 남성은 병원 침대에 앉아 아이들을 안고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온라인상에서 금세 널리 퍼졌다. 그 사진에서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빠진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슴없이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장면, 곧 출산 후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을 흉내 냈다. 여기에는 어머니가 없었다. 단지 두 남성만이 있었고, 그들은 이 아이들에게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구별된 사랑을 알 수 있는 자연적 권리를 박탈한 채, 자신들의 몸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현실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 글의 논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 사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사진은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잘못된 서사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몸을 본래 정해진 목적에 어긋나게 사용하는 것은 결국 가족 형성을 잘못된 관점으로 이해하게 만다. 이 사진은 우리 몸에 담긴 개인적·관계적·사회적 차원을 거부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 세계 가운데 계획하신 바를 어떻게 가로막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몸의 설계와 목적이 긴밀하게 연결된 질서가 깨지거나 왜곡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동성 간 성행위는 출산과 관련된 몸의 설계와 목적을 모두 가로막음으로써 몸을 오용하는 것이다. 혼외 성행위도 그와 비슷하게 성적 활동을 본래의 맥락인 결혼에서 분리함으로써 몸을 오용하는 것이다. 결혼은 그 결합을 통해 새 생명이 생겨날 가능성을 지닌 까닭에 전인적으로 헌신해야 할 전인적 연합이다. 두 경우 모두 몸을 지닌 존재로서의 온전함을 훼손하고, 인간이 번성하도록 의도된 자연 질서를 무너뜨린다.
물론 몸에 새겨진 이 불가항력의 진리는 우리가 부티지지에게서 보았던 거짓을 내몰고 힘 있게 드러난다. 결혼은 두 이성이 영구한 언약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기초 단위이자 문명의 축소판이다. 결혼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 원리이다. 사회 자체가 궁극적으로 여러 가정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결혼이 자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불임처럼 부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의 구조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채우는 것으로 규정되며, 바로 그 상보성에는 본질적으로 생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담겨 있다. 이 상보적 연합을 통해, 결혼은 사회 질서 가운데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성과 젠더에 관한 기독교의 공적 증언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이 가르침이 공동선이라는 더 넓은 틀과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이 관점은 신자들이 방어적인 자세로 물러서기보다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다.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기독교 성경과 전통의 가르침은 오늘날 문화 속에서 여전히 큰 논쟁거리이다. 그러나 핵심 메시지는 단순명료하다. 곧 남자와 여자는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런 흐름은 우리가 신체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담긴 목적 있는 질서를 보여 준다.
신체를 지닌 인간 존재는 결혼과 가정생활로 완성되며, 모든 창조 세계와 사회 질서를 이끄는 윤리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성경적 자연법의 틀 안에서 타당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세속 사회가 계시 종교의 교리를 곧바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인간이 신체를 지닌 존재라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여전히 지속된다. 우리는 결혼을 거부하고 그 보호막 밖에서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이 결국 사회로 하여금 자신의 전제를 되돌아보게 만들기를 소망해야 한다.이미 이런 재고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23년 9월,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은 성경의 가르침과 자연법이 오래전부터 견지해 온 한 진실을 인정했다. 곧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있는 가정에서 자녀가 더 잘 자란다는 사실이다. 세속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새삼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요 세속 매체가 이런 발견을 주목할 만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몸과 결혼과 성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간이 번성하는 본질적인 원리임을 신자들에게 일깨워 준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