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더와 정체성
2026년 05월 23일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
2026년 05월 23일결혼과 이혼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성윤리”의 네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 가지 제도인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세속 문화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어쩌면 이 제도들은 언제나 공격을 받아 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제도들을 향한 세상의 적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거세 보인다. 특히 가정을 둘러싸고는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일부 기독교 교단들마저 무겁게 짓누르는 세속의 힘 앞에 무너져, 가정이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 관계를 이루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등을 새롭게 정의하려 한다는 점이다. 성경적 언어를 버리고 세속적인 재정의를 따르는 것은, 많은 이들이 얼마나 멀리 떠내려갔는지를 보여 주는 충격적인 사례이다. 문화가 진리를 버릴수록, 교회와 진리 편에 서는 사람들을 향한 반대가 더욱 거세지는 듯하다.
지난 세기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정을 인간 문명의 주요한 결함 중 하나로 꼽았다. 그들은 가정을 억압과 사회적 역기능을 양산하는 원천으로 여겼다. 이에 마르크스주의는 국가가 가정을 대신하고, 부모가 아니라 정부가 아이들의 교육을 맡아 감독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는 기대했던 세속적 유토피아를 실현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정의하고 다스리려 한 인류의 시도는 언제나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비극적이게도 마르크스주의는 가정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를 그와 비슷하게 경멸하는 이념적 자녀를 많이 낳았다.
이런 외부의 공격들은 우리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교회와 교회의 가정관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 아닐지 모른다. 1930년대에 존 그레셤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교회를 향한 가장 중대한 위협은 칼과 몽둥이(곧 세상의 공격)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그 세상과 평화롭게 지내려는 태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 내부에서 나타나는 타협이 심각한 독이 되어 교회에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 결국 교회를 성경적 신실함에서 멀어지게 만들까 봐 염려했다. 안락함과 편안함이라는 우상은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우리를 유혹하는 그것들의 노래는 언제나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교회가 세상이 재정의한 결혼관에 굴복하거나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기꺼이 신실함을 희생 제물로 바칠 때, 우리는 참으로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결혼에 관한 교리와 실천에서 어떤 식으로 타협하라고 유혹을 받는가? 타협의 첫 번째 영역은 ‘정의’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때 보수적 신학을 따랐던 기독교 교단들이 핵심 개념들을 기꺼이 재정의하기로 하면서 먼저 자유주의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어를 정의하는 자가 대부분의 논쟁에서 이기기 마련이다. 가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그 정의를 내릴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성경은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으로 정의한다. 우리를 정의하고 우리의 성별과 정체성과 결혼을 정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벌이는 언어 장난에 휘말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일단 정의의 영역에서 타협해 버리면,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보존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 시대의 결혼관 역시 ‘편의주의 문화’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이혼율이 점차 높아져, 교회 밖 세상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많은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이혼이 이미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대부분 2,30년 전의 아이들보다 무엇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가정인지를 훨씬 식별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많은 나라에서 이혼 절차를 너무 쉽게 만들어서, 결혼을 끝내는 일이 자동차를 바꾸는 것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편의를 추구하는 욕구는 종종 우리의 헌신 의식을 위협한다.
일부 교회들은 이런 흐름에 대응해, 건강하지 못한 극단으로 치우쳐 결혼 문제에 지나치게 빗장을 걸어 잠근다. 그들은, 흔히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결혼에 대해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식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듯한 교회들에 반발해, 성경이 허용하는 정당한 이혼 사유마저 부정하는 반대 극단으로 치닫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은 안 된다’는 접근은 안타깝게도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가해자의 악행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을 충격과 상처를 주는 환경에 그대로 남겨 둔 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신 방편마저 끊어 버리는 셈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결혼과 이혼을 다루는 장은 결혼 제도 자체만이 아니라 결혼한 사람들까지도 보호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하고 성경적이다. 이혼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두 가지 이혼 사유를 인정한다. 곧 간음과 고의적 유기이다. 첫 번째로, 간음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계는 피해를 입은 배우자에게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된다. 그다음으로, 고의적 유기는 집을 나가거나 배우자를 방치하거나 학대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부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성경이 인정하는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사유인지를 판단하려면, 목사와 장로들이 공동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간음과 유기라는 두 잘못 모두가 이혼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이혼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깨진 결혼 생활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단지 완전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만은 아니며, 자신의 신부인 교회에게 완전한 남편이 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 외에는 완전한 남편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결혼 제도를 주셨다. 결혼은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을 함부로 여기지 말고, 온 존재를 다해 존중하려고 힘써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정의하시며, 그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혼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우리는 결혼을 매우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 있는 것들이든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든, 결혼을 무너뜨리려는 모든 것들에 맞서 분투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과 힘을 다해 결혼을 세워 가고 결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즐거워할 세대를 길러 내야 한다. 건강한 결혼은 하나님 보시기에만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에게도 아름답고 가치 있으며 귀하다.
편집자 주: 이 글은 2023년 6월에 처음 게재된 글을 바탕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