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구원론이 직면한 현대의 도전들
2026년 04월 02일
16세기, 구원론의 개혁
2026년 04월 09일로마 가톨릭의 성사적 구원론의 형성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구원론”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5세기와 6세기에 여러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주의와 반(半)펠라기우스주의는 모두 정죄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결국 교회를 다시 반펠라기우스주의적 방향으로 몰아갈 만한 사상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컨대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의 구원을, 다양한 금욕적 수행을 통해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사상이 기독교 수도원 공동체에 깊이 자리 잡았으며, 이 공동체들은 교리 발전에 지대한 신학적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위(僞) 디오니시우스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신학자들의 저술에서도 발견된다.
종교 개혁이 일어날 무렵에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맞서 싸워 거두었던 많은 성과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보다 개인의 공로에 더 의존하는 교회-성사적 구원 체계(ecclesio-sacerdotal system of salvation)가 전반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개혁주의 구원론이 그 신학 체계에서 태동했으며, 거기에 맞섰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가톨릭의 구원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개혁주의 구원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을 파악하려면,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아담은 선하게 창조되어 자신의 자연적 목적에는 이를 수 있었으나, 본성상 궁극의 종말론적 목적, 곧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뵙는 ‘지복직관’에는 이를 수 없었다.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아담은 자연적 질서에 속한 존재에서 초자연적인 질서에 속한 존재로 격상되어야 했다. 그는 죄 된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부여받아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의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성화 은혜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그 일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것은 ‘부가적 선물(donum superadditum)’이다. 그것은 아담의 인간 본성을 고양시키고, 그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했다. 또한 그가 자신의 공로로 궁극의 종말론적 목적에 이를 수 있게 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 상태를 상실했다. 이 타락은 부가적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상실하게 했으나, 인간 본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중세 시대에는 아담의 인간 본성, 특히 이성과 의지의 기능이 어느 정도까지 손상되었는지에 관해 견해가 엇갈렸다. 어떤 이들은 아담의 인간 본성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그저 그가 창조되었을 당시와 같이 은혜의 선물이 주어지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그의 본성이 손상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아담의 후손은 이렇게 타락한 상태로 태어난다.
신학에서는 무엇을 문제로 보느냐에 따라 해결책의 본질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창조, 죄, 타락의 결과에 관한 교리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중세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문제를 성화 은혜라는 선물을 상실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에 따라 구원을 그 선물을 되찾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하기에 로마 가톨릭 체계에서 구원은 타락한 인간이 초자연적 질서에 속한 존재로 다시금 고양되는 것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사(성례)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로마 가톨릭의 교회론과 성사론이 곧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교회(church)’라는 의미의 ‘ecclesio’와 ‘성사(sacraments)’라는 의미의 ‘sacerdotal’을 더하여, 이를 로마 가톨릭의 “교회-성사적 구원 체계”라고 지칭해 왔다.
로마 가톨릭 체계에서 세례는 아담의 자손을 아담이 떨어져 나간 초자연적 질서의 존재로 격상시키는 성사이다. 세례는 그 사람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세례를 통해 성화 은혜라는 선물이 영혼에 심기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된다. 이 성화 은혜는 의화 은혜(justifying grace)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로마 가톨릭의 구원 체계 안에서 세례는 의화의 도구적 수단으로 이해된다.
새 신자는 세례성사 후 견진성사를 받는데, 이는 성화 은혜를 증가시키고 견고하게 한다. 또한 신자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도 성화 은혜를 더욱 증가시키고 굳세게 한다. 신자는 이와 같이 격상된 성화 또는 의화의 상태에 머무는 한, 마지막에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공로를 쌓는 선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은, 최악의 경우라도 천국에 가기 전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그칠 뿐이다.
반면 신자가 대죄(중대한 범죄로 간주되는 죄)를 범하면, 그는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진다. 이렇게 은혜의 상태 밖에서 죽는 사람은 연옥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 구원에 대해 어떤 소망이라도 가지려면, 반드시 격상된 은혜의 상태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다. 세례는 한 번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죄인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가?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이 목적을 위해 마련된 성사가 있다.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진 죄인은 교회에 가서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 죄인은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금 의화의 상태로 격상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공로로서 선행을 수행할 수 있다.
종교 개혁 당시에는 이 교회-성사적 구원 체계가 서방 교회를 지배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영적 불확실성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또한 사람이 은혜의 상태에서 죽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그들의 영적 생활에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음 글에서는 종교 개혁자들이 발견한 위대한 진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로써 그들은 유럽 사람들에게 다시금 참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