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에 사로잡힌 사회
2026년 05월 23일
결혼과 이혼
2026년 05월 23일젠더와 정체성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성윤리”의 세 번째 글입니다.
내 아들 중 하나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종종 자기 나름의 아메리칸 드림이라 할 만한 개인적인 포부를 강하게 밝히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는 커서 바닷가재가 될 거야.” 그 아이의 확고한 비전을 들을 때마다 내 생각은 갈팡질팡했다. 과도한 비디오 게임이 낳은 게으른 근시안과 목적 없는 망상에 비하면, 나는 분명하고도 흔들림 없는 비전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반가웠다.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은 그 아이의 보잘것없고도 분명히 기이하며, 솔직히 말해 불가능한 포부에 얼굴을 찌푸렸다.
불가능하다고? 그리 단정하기는 이르다. 나는 얼마나 순진했고, 그 아이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조숙했던가. 25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사람이 갑각류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칭송하고 지지할 것이다. 내 아들의 친구는 너무나 일찍 태어난 까닭에 기다려야만 했다. 이 시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닷가재로 규정하고 싶은 아이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기 목소리로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 오늘날 어느 누가 감히 소년이 바닷가재나 접이식 의자나 유성이나 소시지 패티가 될 수 없다고, 또는 여자가 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겠는가?
이 시대의 지혜는 이렇게 흘러간다. 즉, 자기 결정권을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로 여긴다. 내가 내 실재를 만들어 내며, 당신은 나에게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을 포함해 그 누구도 내 말의 권위나 진실성을 위협하지 못한다. 내 우주를 만들어 내는 데 엿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라도, 내 세계와 내 의미와 정체성을 세우고 그 위에 군림할 권리가 나에게 있음을, 당신은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바닷가재로 정체화하면, 나는 바닷가재이다. 내가 접이식 의자로 정체화하면, 나는 접이식 의자이다. 내가 남성일지라도 여성으로 정체화하면, 나는 여성이다.
이런 자기 결정권은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을 거스르는 날 선 반역의 소리를 내지르며,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자기중심적으로 변질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정체성’은 어휘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일관되게 어떤 존재의 속성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즉, 정체성은 인간의 지적 또는 사회 구조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확정적으로 주어진 상태를 가리켰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정체성은 새로운 출발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정체성은 자기표현을 부추겨, 나의 생각과 열정과 내가 주장하는 권리를 보좌에 앉히고 스스로를 숭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나 자신만큼 나를 아낄 수는 없다고 확신하고서 공허한 영혼을 채우는 데 절박해진 채, 외로움과 불만족에 맞서기 위해, 인생을 스스로 주도하는 여행인 양 살아간다. 사랑이나 유대감처럼 가치 있는 것들마저 지나치고도 왜곡되게 갈망하게 되면, 더욱더 자기 자신만을 의존하게 된다. 그 모든 과정에서 대중 종교는 나의 대의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곧 내가 신이며, 나 자신의 정체성은 내가 선언한다. 정체성이 곧 권위이며, 좋든 싫든 내가 주도권을 쥔다.
나는 내 영역의 주권자로서, 나의 “자유로운……경륜을 따라” 내 세계를 “인도하고 처분하고 다스린다.” 짐작하겠지만, 이 말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1절을 오용한 것으로,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로 다스리시는 통치자를 그 보좌에서 밀어내려는 나의 터무니없는 시도를 드러낸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정체성의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오직 창조주께만 속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는 선언을 빼앗으려는 신성모독을 저지른다. 이 모든 일 가운데 내 오만은 오싹하리만큼 내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자주 회자되는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의 시 ‘인빅터스(Invictus)’조차도 이처럼 아무 제약 없는 지배나 절대적인 선장 노릇, 독단적인 정복이 나타나리라고는 내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다.
우주의 왕을 밀어내려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 쿠데타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은 죄인들을 더 큰 죄에 내버려 두시는 것이 죄에 대한 심판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롬 1:18,24,26,28 참고). 인간이 내세우는 자율성은 오히려 전적으로 타락한 실상을 드러내고 그 어리석음을 폭로할 뿐이다. 왜곡된 정체성과 젠더를 옹호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으며 자유롭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도리어 그들을 어둡게 만들고 정죄에 이르게 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 1:22).
비틀거리면서 질주하는 문화적 혼돈의 한가운데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며, 태초에 선포하신 그분의 말씀 가운데 정체성의 문제를 직접 다루신다.
창세기 1,2장은 찬란한 다양성과 생동하는 힘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기원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오직 그분만이 주권적 창조주이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피조물이다. 이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것은 만물, 특히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은 식물과 생물을 “종류대로”(창 1:11,12,21,24,25) 만드셨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을 때(26-28절 참고), 창조는 장엄한 절정에 이르렀다. 창세기 2장 7절에는 이 놀라운 창조 행위가 더 자세히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친밀하고도 직접적이며 의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은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어 그의 완전한 짝이 되게 하셨다(창 2:21,22 참고).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처럼 이분법적인 성별의 창조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게 했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는 틀을 세웠다. 이 최고의 창조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창세기 1장 31절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말씀으로 이를 강조한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에 대한 감격에 겨워 “이것을 보라!”라고 외치면서 듣는 이의 반응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고, 그렇게 경탄해야 한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두 개의 성으로 만드셨다. 즉,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남성 또는 여성으로 지으셨다. 유일한 참 하나님은 우리를 기묘하고도 놀랍게 지으셨다(시 139:14 참고). 또한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선하심 가운데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구속받았다(롬 11:33–36 참고). 우리는 머리카락 색깔이나 발 크기, 키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별 역시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신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참된 신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홀로 복되신 하나님으로 서 계신다.
정체성은 이 하나님께서 세우고 규정하신 틀 안에 자리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타락한 피조물이 궁리해 내거나 가장 깊은 열망에 따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말하고 예수님께서 거듭 확증하셨듯이, 참된 생명과 자유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는 데서 나온다(신 8:3; 마 4:4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분의 영광을 추구할 때, 인간의 목적이 올바로 규정되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게 되어 가장 깊은 만족을 누릴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그분이 계시하신 질서를 기뻐할 때 자신의 참된 자리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젠더와 정체성에 관한 모든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
오늘날 어떤 경우에는 젠더라는 말이 생물학적 성(남성과 여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전적 특징 및 신체 구조와 관련된 성은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젠더는 이런 성을 지닌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삶에 적용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남성성 또는 여성성을 기능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을 가리킨다. 젠더 역시 이분법적이다. 최근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알프레드 포이리에(Alfred Poirier)가 지적했듯이,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일관되게 남자와 남성, 여자와 여성이라는 말을 혼용해 사용한다. 성경은 성과 젠더 사이에 혼란스러울 것이 조금도 없음을 보여 주며, 성이나 젠더의 범주를 넘나들거나 입맛대로 젠더를 선택할 여지도 전혀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로,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이 젠더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규정해야 한다. 성경은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명확히 제시한다(엡 5:15-33 참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다양한 관계와 역할 안에서 젠더의 구별을 지켜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물론 젠더 특유의 표현 양식 중에는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도 있다(예를 들면,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이라는 식으로). 이렇게 문화적으로 형성된 양식이라 해도 도덕과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며, 단순하게 다룰 문제도 아니다. 의복과 머리 모양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서부터 군 복무 같은 직업 문제에 이르기까지, 젠더에 관한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체로 걸러 내야 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지역적, 권역적, 세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가정과 교회와 사회라는 관계망 속에서 두 성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젠더 문제를 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건하게 적용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는 여러 중요한 내용들 가운데 세 가지만 선별해 제시하고자 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재정의하고 반역을 꾀해도, 피조물인 우리는 실제로 창조주가 될 수 없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우상숭배일 뿐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피조물인 우리의 본분은 창조주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지, 창조주께 어리석게 맞서는 일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절대적 권위와 자존성을 지니신 한 분만이 정당하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자신을 밝히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성별의 구분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남자 또는 여자로 창조하셨다. 성과 젠더는 하나님께서 확정적으로 주신 것이지, 유동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이분법적인 것이지, 사람이 고안해 낸 잡다한 선택지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인류를 부패시켰으며, 죄의 보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육체의 비정상적인 상태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에 따라 간성(間性)과 같이 유전적으로 유발된 다양한 이상 사례가 존재한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나타나는 유전적 변이를 젠더의 유동성을 주장하는 견고한 토대로 삼을 수는 없다. 간성 아동의 발생률이 높다는 주장은 각별히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실제 수치를 부풀리기 위해 간성의 정의를 입맛에 맞추어 부정확하고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설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녀가 남성과 여성의 성 기관을 모두 지니고 태어났다면, 부모는 자녀가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이분법적이고 이성애적인 설계에 복종하는 삶의 결정을 내리도록 도울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성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에 걸맞은 대명사가 아니라 누군가가 선택한 대명사를 우선하여 사용하라는 압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 건강한 관계를 세워 가려면, 성과 젠더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구별을 지켜야 한다. 남자와 여자를 향한 하나님의 설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서로에게 속하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이 둘을 혼동하거나 뒤섞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성과 여성은 그분이 설계하신 역사 속에서 구속자와 구속받은 자의 구별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런 젠더 구분이 무너질 때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폄하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정체성과 젠더의 문제는 매우 개인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정체성과 젠더에 관한 주장을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에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으며, 성과 젠더를 포함한 만물의 정체성과 의미와 목적이 그분의 선언에서 비롯된다(요 1:1-3; 골 1:15-17 참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다. 타락한 남자와 여자는 우상숭배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와 정체성 체계를 세우는 것을 비롯해 무수한 방식으로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풍성한 긍휼 가운데 우리를 구속하고 회복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의 부활의 능력으로, ‘내가 신이며 내 정체성은 내가 선포한다’는 수렁에 빠진 자들을 건져 내신다(데이비드 가너의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The Gospel and Identity in Christ]’ 참고, wm.wts.edu/gospel-and-identity).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아버지와 하나이실 뿐 아니라(요 10:30 참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히 2:11 참고) 구속자 안에서 주어지는 정체성이 지닌 변화의 능력으로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신다.
우리가 지닌 정체성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나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영광스러운 아들의 완전한 형상을 본받아 은혜롭고도 능력 있는 자로 새로워졌다(롬 8:29 참고).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참으로 그렇다. 우리가 그러하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