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의 증거
2023년 01월 20일
요한의 증거
2023년 01월 26일누가의 증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복음서”의 네 번째 글입니다.
당신이 1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고 잠시 상상해 보자. 당신은 많은 사람이 “주님(Lord)”으로 부르는 가이사(caesar)의 통치 아래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당신은 할례와 같은 관행을 거부하지만 대부분의 삶에서 유대교의 윤리를 존중했다.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즉 모세의 율법의 의식적 규정을 채택하지 않고 유대교의 일신론을 받아들이는 이방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제 당신이 방금 바울이라는 사람에게서 구원의 복음을 들었다고 상상해 보자. 사도는 당신에게 당신이 국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지만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예수님에게 순복하는 사람은 유대교의 달력, 음식법, 할례를 따르지 않고도 유대 민족에게 약속하신 온전한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신은 사람들이 경멸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분파의 일원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많은 이교도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후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당신의 믿음을 비웃는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유대인 친구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일부 유대인은, 이방인인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율법의 멍에를 메지 않은 당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아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소식이 바울과 그의 친구들인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전해졌다.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거짓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당신은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성육신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방인인 당신이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에 포함될 수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당신은 거짓말쟁이들과 예수님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누가복음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평생 신약성경 전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복음서가 그 의도와 강조점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확실히 사복음서는 모든 독자를 위한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과 구세주로서 따를 수 있도록 그분에 대한 사실을 제시한다. 하지만 복음서 저자 중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 각자는 특정한 요구를 가진 주요 독자를 염두에 두었고, 이것은 그들의 글에서 강조할 이야기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각 복음서의 강조점을 이해하면 복음서가 하나만 있을 때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더 풍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누가복음은 복음서 저자의 목적을 분명한 진술로 시작한다. 그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일목요연한 설명을 통해 데오빌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1:1~4). 분명히 그 당시에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분의 생애에 관한 개별적인 일화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와 다른 독자들에게 구주의 사역에 관한 보다 완전한 역사를 제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누가는 이 단편적인 기록들, 다른 복음서들, 목격자들과의 면담 등을 사용하여 성령의 영감을 받아 데오빌로에게 그의 관심사를 설명할 서면 문서를 제공하기 위해 앉았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섭리 속에서 누가가 우리 구주의 삶과 사역에 관한 질서 있는 설명을 기록하도록 그를 특별하게 준비시키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의 가장 충실한 여행 동반자로서(딤후 4:11), 누가는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바울이 접촉했던 사도들에게서도 예수님에 관한 많은 정보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또한 누가는 훈련받은 의사였다(골 4:14). 그가 받은 교육은, 복음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연구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누가에게 데오빌로라는 친구를 주셨다. 예수님에 관한 데오빌로의 관심을 다루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은 누가가 데오빌로의 질문을 다룰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없었을 하나님의 목적을 엿볼 수 있는 복음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동기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누가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주님이 되시며, 그들의 곤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태, 마가, 요한도 이 점을 지적하지만 특별히 누가의 작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의 복음서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이방인의 후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세련되고 문학적으로 고급이었다. 누가가 그리스도에 대해 듣기 전에 유대교로 개종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영감을 주어 그분의 아들의 생애를 기록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누가는 또한 누가복음 3:23~38절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열방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을 드러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육신을 따라 예수님의 조상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유대인인 메시아도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의 모든 사람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또한 세계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통해 열방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물론 성경의 모든 책과 함께 사복음서 모두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기록된 시간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역사적 구조는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을 구속하려는 창조주의 의도를 독특하게 보여준다. 구조적으로 말하면, 세계 역사에서 하나님 역사의 3단계 진행 과정은 누가가 쓴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잘 보여진다. 누가복음 1:1~3:22절은 이스라엘안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사역을 강조한다. 따라서 세계사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기 위해 거룩한 백성으로 예비하신 유대 민족의 시대이다. 누가복음 3:23절과 사도행전 1:26절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시대, 즉 예수께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유대인과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신 세계 역사의 두 번째 단계를 나타낸다. 사도행전 2~28장과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 역사(행 28:28에 함축되어 있음)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의 사역을 통해 성취하시는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시간이다. 인류 역사의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성령이 교회를 감동시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할 때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퍼진다. 이 기간의 주요 사건은 고넬료의 회심에서처럼 복음과 성령이 이방인에게 확장된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찾을 수 있다는 표적이다(10:1~11:18).
또한 세계사에 대한 누가의 특별한 관심은 독자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다른 성경 저자들이 세속 역사의 인물과 사건에 관해 언급한 횟수 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세속 역사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언급의 회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누가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가이사이고 퀴리니우스(Quirinius)가 시리아의 로마 총독이었을 때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1-7). 이것은 성육신을 실제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에 놓고, 이 이야기가 신화이거나 역사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선언하려는 모든 사람을 반박한다. 이와 유사하게 사도행전 11: 27~30절은 “글라우디오 때에” 일어난 기근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행동을 실제 역사에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시간 가운데 일하시는 것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리적 세계를 악하고 신적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던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이 실제로 물리적 세계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은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또한 이것은 주님이 영적 세계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 사람, 사물의 영역을 구속하려고 의도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가의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헬라인과 다른 이방인에 대한 관심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밖에 있고 세상에서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좋은 소식이다. 버림받은 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타락한 피조물에게도 참된 희망이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 내에서 버림받은 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도 있음을 보여준다. 1세기의 여성들은 유대 사회에서 멸시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남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여성들도 기꺼이 가르치심으로 그들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셨다(눅 10:38-42). 대부분의 랍비가 여자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혁명적인 행위였다. 누가는 몇몇 부유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고 말한다(8:1-3). 또한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는 남자 제자들이 문제가 생길 조짐이 보이자마자 도망갔을 때도, 여인들은 예수님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때 얼마나 충실하게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는지를 보여준다(23:44~24:10; 또한 마 27:45~28:10; 막 15:33~16:8; 요 19:25~27; 20:1~3 참조).
의와 부는 함께 간다는 믿음 때문에 1세기 유대 사회의 많은 곳에서 버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복음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 누가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가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에서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드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눅 2:22~24; 레 5:1~13;12).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부부는 메시아를 성인으로 키우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더없이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누가는 또한 궁핍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의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록한다(6:20~21; 12:13~21; 16:19~31).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의롭다거나 어떻게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요점은 아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우리의 창조주께서 사회에서 잊혀지거나 버림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분의 나라는 강하고 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나라이다. 의지할 물질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가장 잘 안다. 심령의 가난함은, 물질적으로 성공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구원받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어떤 것도 누가로 하여금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이 가진 이런 측면을 기록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용할 자료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건을 설명할 수도 있었다(요 21:25). 하지만 성령 하나님의 인도 아래 누가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이방인과 다른 소외된 자들을 향한 전능자의 관심을 강조하는 복음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우리는 이런 강조점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강조점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죄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셨고 그분의 아들을 믿는 모든 자를 영원히 버림받은 자로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는 참된 소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