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2026년 06월 19일진정한 예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진정한 기독교”의 일곱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시편 29편에서, 다윗은 천사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요청한다. 이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1,2).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란 무엇인가? 모든 영광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사실 예배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아름답게 보여 준다. ‘예배’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사람이 자기 앞에 계신 분의 옷자락에 엎드려 입 맞추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와 같은 행위는 경배와 경외함, 사랑과 의존과 겸손을 나타낸다. 예배 안에서, 낮은 자는 높으신 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는 데 열심을 품고 계신다. 이사야 48장 9절과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우주의 거룩한 주권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일에 열심을 품고 계신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신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제일 되는 목적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렇다면 시편 29편에서 다윗은 왜 천사들에게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요청할까? 그것이 천사들의 임무이기 때문일까? 그렇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동기가 다윗을 이끌고 있다. 그는 자기 목소리만으로는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천사들에게 함께 찬양하자고 요청한다. 즉, 다윗은 그토록 크신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리기에는 자신이 지극히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다. 이는 올바른 자각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그를 낮아지게 만든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반드시 위대하신 그분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예배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Let us offer to God acceptable worship),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29; 강조 추가).
│마음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예배에 외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 합당하고도 진정한 예배를 정의한다면, 분명 경외함을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예배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은 경외함과는 거리가 멀다.
몇 년 전, 나는 어느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한 목사가 아무런 소개도 없이 교회 강단으로 걸어 올라가더니, 마이크를 잡고 “이봐요, 예수님”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가볍게 던진 말이 예배를 시작하는 기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봐요,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런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면 경외심이 일기 마련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신을 벗었으며,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욥기 40장에서 욥은 입을 다물었으며,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떨었고, 요한계시록 1장에서 요한은 죽은 자같이 엎드러졌다. 심지어 보좌 앞에서 밤낮으로 예배하는 장로들과 천사들조차 결코 가볍게 예배하지 않는다. 합당하고도 진정한 예배에는 ‘경건함과 두려움’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예배가 경직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받아 주시며, 우리가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기쁨과 확신은 경건함과 두려움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측면 모두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이 또한 우리의 주님이요 왕이며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봐요,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되, 언제나 경외함으로 나아간다.
또한 우리는 합당하고도 진정한 예배를 생각할 때, 태도가 올바른데도 영이 그릇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복음 4장은 진정한 예배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23,24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할 때는 우리의 영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그 일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 영을 변화시킬 때에만 일어난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특히 우리 각자의 영이 실제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원하신다. 마음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예배에 외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저 예배의 형식만을 따라갈 뿐이라면, 그런 예배는 진정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에게 그런 식으로 예배하지 말라고 거듭 경고하신다. 그분은 이사야 29장 13절에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하시면서, 그런 백성을 징계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또한 호세아 6장 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나는 지금까지 주례한 모든 결혼식에서, 신랑에게 관심이 없는 젊은 신부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젊은 신부가 무심하게 서약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줄 때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또한 내가 “이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고 말할 때, 신부가 딴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신부가 신랑과 언약 관계를 맺어 자신을 맡기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광경일 것이다. 결혼 예식은 한낱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 내가 주례한 신부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부는 마음이 벅차오르고 매우 기뻐하며, 온 우주에서 자신이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인 듯 느낀다. 그리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고 고백할 것이다.
주일 아침의 공예배는 언약을 갱신하는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서약과 약속을 되새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우리가 그분께 드린 서약과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금 다짐한다. 그런데 그저 형식만 따라간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이 실제로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진정하고도 합당한 예배에는 진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이다.
이제 마지막 요점을 살펴보자. 하나님께 합당하고도 진정한 예배는 진리를 따르는 예배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에 관심을 두신다는 점에 주목하라.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중심으로 예배를 이끌어 가곤 한다. R.C. 스프로울(R.C. Sproul)은 언젠가 이렇게 지적했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체감하는 필요를 완벽히 채워 주도록 설계된 유일한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시내산 아래에서 드려진 금송아지 예배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진리”에 따라 예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계시하신 대로 예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점을 잘 설명한다.
“참되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된다. 이는 사람이 상상하거나 고안한 바를 따라, 혹은 사탄의 제안을 따라,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나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제21장 1절).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예배를 규정하고 지배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저 말씀을 읽고, 말씀을 설교하고, 말씀을 노래하고, 말씀을 고백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성례를 통해 말씀을 눈으로 본다. 우리 예배의 요소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브레인스토밍이나 상상력에서 비롯된 산물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회중의 의견을 조사하거나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결정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하고도 진정한 예배는 그분의 진리가 규정하고 지배하는 예배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은 실상 결코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놀랍고도 기쁜 의무가 주어졌다. 하나님께 합당하고도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곧 마땅한 경외함을 품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자. 그분께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