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인가?
2026년 06월 15일
진정한 예배
2026년 06월 19일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진정한 기독교”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최근에 나는 인터넷으로 아들이 입을 운동복 셔츠를 하나 샀다. 어찌 보면, 아주 좋은 가격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지나치게 저렴했다. 진품이라고 단언했지만, 막상 상품을 받아 보니 진품이 아님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셔츠를 산 곳은 공식 판매처가 아니었고, 그 셔츠 역시 안타깝게도 진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가짜 상품을 사는 것과 사람으로서 진실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진실하지 못하다는 평가는 결코 칭찬이 아니다. 가식적이거나 거짓되거나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쌓아 온 경력을 끝장낼 수도 있고, 인간관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교회 안에도 언제나 진짜가 아닌 이들이 존재해 왔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지만, 결국 참된 제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8장의 마술사 시몬이 거짓된 자들로 밝혀졌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일을 행했다고 말하겠으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대답하실 것이다(21–23절 참고).
이처럼 교회 안에는 언제나 참되지 않은 자들이 있다. 반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정성을 추구하면서 씨름하고 싸우는 모습으로 구별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님을 신뢰하는 동시에, 죄와 싸우고 있는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이처럼 큰 모순이 있음을 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죄 사함과 양자 됨,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풍성한 복에 감사한다. 한편(이 ‘한편’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삶에 간극이 있음을 안다. 곧 우리가 알고 믿는 바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 사이의 간극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죄가 있음을 안다. 우리 마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서 멀어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할 때도 있다. 결국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과연 진짜인가?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와 관련해 존 뉴턴이 남긴 말은 유명하다.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에 이르지 못했고, 내가 바라는 모습에 이르지도 못했으며, 장차 올 세상에서 되고자 소망하는 모습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에게는 그런 현실 인식과 통찰이 필요하다.
이처럼 진정성을 추구할 때는,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신약성경에는 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에서 ‘너’라는 말을 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개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물론 그것이 옳을 때도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갈 2:20) 분으로 고백하는데, 여기서 ‘나’는 이 글을 쓴 바울과 독자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복을 주로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것으로 묘사한다. 신약성경을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스물일곱 권 중 스물한 권이 교회들에 보내는 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그 말씀을 읽고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숨 쉬는 서구 문화의 공기는 개인주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흐름을 인식하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교회에 선물로 주셨고, 또한 교회를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셨다.
신약성경에는 ‘서로 ~하라’는 명령이 쉰아홉 번 나온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화목하라’, ‘서로 돌보라’, ‘서로 문안하라’, ‘서로 오래 참으라’, ‘서로 격려하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등 그 예를 얼마든지 더 이어 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은 곧 그리스도의 교회에 온 마음으로 헌신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이다. 성경은 각 지체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비유로 교회를 묘사한다(롬 12:4,5; 고전 12:13–27 참고). 어떤 이는 눈이고, 어떤 이는 발이며, 어떤 이는 손가락이다.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고,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며, 모두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몸과 거리를 두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한 지역 교회에 속하여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활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사역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엎드리며, 성례에 참여하고, 성도들과 함께 기도에 힘쓰게 된다. 예배나 기도 모임에 그저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큰 격려가 된다는 사실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라. 한 교회에 헌신한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교회는 내 가족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복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자리에서 형제자매를 섬기겠습니다. 또한 주님과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헌신하면서 살고자 힘쓰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삶의 방식을 두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내주는 삶을 산다.
물론 이런 삶은 교회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일에서 예외일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가정 안에 두셨으며, 성경을 통해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치신다(엡 5:22–6:4 참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교회가 예수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며, 자녀들은 주 안에서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가 어떻게 살도록 부름받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행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광에 이르기 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행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은혜로운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나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가정을 감싸고,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는 분위기가 그곳에 감돌 것이다(엡 4:32 참고).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터에서의 소명을 주셨다. 노동은 창조 질서에 속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선물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노동이 훼손되어 온갖 좌절로 가득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형성하며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일에서 선함을 발견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좌절을 안겨 주는 우리의 노동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노동에 대한 이런 이해는 우리가 삶에서 일을 지나치게 중시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우리의 일은 우리를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안정감과 정체성은 직업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과 안식의 질서에 주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출 20:9,10)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삶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견고한 반석이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요일 4:19 참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것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분의 구원 사역을 기뻐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시편 116편은 이 사실을 아름답게 표현하는데, 기도에 응답하시고 구원하고 건지시는 하나님, 은혜롭고 의로우며 긍휼이 많으신 그분께 초점을 맞춘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1–5절).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깊이 알기를 간절히 바라게 한다. 참된 교리 연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으로 열매 맺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되신 하나님 위에 세워진다. 그분은 반석이시며, 다른 이는 없다(사 44:8 참고). 그분은 여호와이시며, 다른 신은 없다(사 45:5 참고). 그분의 백성이 다함께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살기를 추구할 때, 그것은 여러 면에서 매우 평범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비범한 삶이다. 외부인은, 그들이 고난도 겪고 완전하지도 않은 듯 보여도 실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요 강하여 용맹을 떨치는 이들임을 알아야 한다(단 11:32 참고).
결국 우리의 삶은 우리가 믿는 바를 말해 줄 것이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진정성을 강조하신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우리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셨으며(마 6:21 참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씀하셨다(눅 6:45 참고).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하는 우리의 삶은 진정성의 표지가 되어, “여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지켜보는 세상에 이보다 더 강력한 증언은 없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