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증거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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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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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증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복음서”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나는 방금 요한복음을 다시 읽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요한복음은 놀라운 책이다. 문학적 차원에서 요한복음을 읽는 것은 즐겁다. 어휘는 매우 간단하지만 유사한 표현의 반복적인 사용이 심오하다(예를 들어 “나는 있다”라는 진술). 명확한 구약성경 인용문은 많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의 주제와 암시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목자”, “빵”, “들린 뱀”). 반어적인 예도 많다(예를 들어, 눈먼 사람은 예수님을 “보지만” “보는” 자들은 볼 수 없다(요 9장).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야바의 예언은 그가 아는 것보다 더 심오한 진실이었다(요 11:50).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속의 청중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독자는 이해할 수 있다(예를 들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 책에는 예수님, 때때로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 그리고 적대적인 “유대인”과 바리새인을 포함하는 흥미로운 줄거리가 있다.

문학적 차원을 넘어서 나는 요한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거의 모든 단락을 통해 독자는 그리스도의 전능한 능력뿐만 아니라 죄인에 대한 주님의 연민을 잘 알게 된다. 참으로 요한복음에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잘 드러나 있다.

대체로 요한복음의 개요는 다른 정경 복음서와 비슷하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세례 요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그런 후에 유월절, 재판, 그리스도의 죽음을 포함하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주와 같은 큰 부분으로 나뉜다. 한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개요는 요한복음의 개요보다 서로 더 비슷하다. 다음은 간략한 개요이다.

서언: 1:1~18

세례 요한: 1:19~51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 2:1~12:50

다락방에서 부활까지: 13:1~20:29

책의 목적: 20:20~31

갈릴리의 베드로: 21:1~25

예수님은 “아들”이시다

성경의 모든 책 중에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인격에 가장 초점을 맞춘 책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24:44~47; 요 1:45, 5:39; 고전 2:2). 또한 다른 세 복음서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다.

요한복음 자체에서 예수님의 인격의 가장 강조된 측면은 그분이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때때로 예수님은 단순히 “아들”(요 3:35~36), 또는 “하나님의 아들”(1:34, 11:4, 20:31), 또는 “(하나님의) 독생자(낳으신/유일한)”(1:14, 3:16~18)로 언급된다. 이 “아들”과 관련된 표현은 요한복음 1:1~3, 18; 5:18; 10:30; 20:28에서 확증하는 것처럼 모두 예수님의 신성(삼위일체적 이해 안에서)과 분명하게 관련 있다.

신성과 그 신성에 일치하는 것 외에도 이렇게 “아들”을 강조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아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와 사랑을 추가로 설명하기 위함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아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더욱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사랑이 삼위일체 가운데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3:35),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14:31).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맺고 있는 관계적 측면의 일부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일로 확장하여 논의하는 단락이 많이 있다(5:19~24; 8:16~29; 10:24~29; 14: 6~13; 17:1~26). 또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본문이 있다(14:16~17, 26; 15:26; 16:13~15).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의 또 다른 측면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이 성부와 동등하신 분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은 종속되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신학자들은 이 두 종류의 본문을 구별하기 위해 “존재론적(ontological)”(존재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함) 및 “경륜적(economical)”(사역적인 의미에서는 종속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관하여 그분은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서 성부와 완전히 동등하시다(존재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 예를 들어 요한은 말씀(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다”(1:1-2)고 선언하는 그의 복음서의 위대한 시작 부분에서 이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라고 외치는(요한복음의 목적을 진술하는 문장 바로 전) 요한복음의 절정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과 사역을 설명하실 때 자신을 아버지(경륜적 삼위일체)에 종속된 것으로 여기신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12:49~50; 또한 요 5:30; 8:29; 14:28 참조). 삼위일체의 삼위가 존재에 있어 동등하시지만 각각 다른 사역을 하시는 이런 삼위일체적 관계는 교회 안에서 본보기가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평등하지만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은사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신성, 영원한 존재, 전능하심에 대한 이런 강조를 고려할 때 요한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인성을 담대히 선포한다. 서언(序言)에 “말씀[예수님]이 육신이 되어”(1:14)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인성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나타난다(19:30). 예수님이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지게 하셨을 때 그의 인성은 부활 후에도 계속됨을 나타내셨다(20:27). 그렇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시며 계속해서 영원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인데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개의 구별된 본성이지만 한 인격을 영원히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구원자가 있다!

위에서 나는 주로 예수님의 “위격” 즉 그분이 누구였으며 누구이신지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무엇인가? 분명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주요 사역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구속자가 되시는 것이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다. 덜 강조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창조주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이다. 요한복음 서언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진술로 시작된다(1:1~2). 이런 진술 바로 다음 예수님은(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우주의 창조주(그리고 유지자)로 묘사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서언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예수님이 자신이 만드신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배척당하셨다는 서글픈 언급이 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10). 창조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런 서언의 강조는 예수님이 요한복음 전체에서 행하신 많은 기적의 배경이 된다. (예수님이 창조주이신 다른 신약 성경 본문은 고전 8:6; 골 1:15~18; 히 1:1, 10~12를 보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본뜬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요한복음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분명히 독특한 관계를 갖고 계신다. 반면, 겉보기에 모순되는 방식으로 기독교인과 예수님의 관계는 부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본뜬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예수님)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기독교인들)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가깝고 친밀한 관계(“-안에(in)”)는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하나님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모범이다. 참된 포도나무 비유는는 이런 연합을 반영한다(15:1~11).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독특한 사랑을 아들과 우리 사이의 사랑으로 연결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또한 요 14:21, 17:26 참조). 또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랑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뜬 것이다(13:34).

예수님과 그분의 양들이 서로를 “아는” 방식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 대해 가진 친밀한 지식을 본뜬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그리스도인이 되는 한 가지 측면은 예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예수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7:18; 20:21). 예수님은 “보냄”을 받으셨고 해야 할 “일”이 있으셨다. 예수님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성부와 성자의 연합을 따른 것임을 깨달을 때 설명된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7:11). 분명한 것은 요한복음은 놀라운 책이다. 요한복음을 올바르게 끝까지 읽자. “아들”이신 예수님과 우리가 예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따라 부분적으로 형성되는지 묵상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로버트 카라
로버트 카라
로버트 카라(Robert J. Cara) 박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Charlotte, N.C)에 있는 개혁 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교무처장, 최고 학술 책임자(chief academic officer), Hugh and Sallie Reaves 신약 성경 교수이다. 그는 Cracking the Foundation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과 곧 출간될 히브리서 주석서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