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2026년 10월 27일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2026년 10월 27일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만물의 제일되는 목적”의 세 번째 글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위대한 업적과 관련되어 있다. 전설적인 미식축구 감독인 빈스 롬바르디(Vince Lombardi)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정한 영광은 쓰러져 무릎을 꿇더라도 다시 일어나 세상을 향해 ‘아니, 나는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롬바르디의 말은 자신의 유익과 이득을 위해 영광을 추구하는, 흔하지만 잘못된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런 맥락에서 영광은 ‘두드러진 업적을 통해 얻는 명예와 존경’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첫 번째 질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답함으로써, 우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하여 제시하는 개념은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을 생각해 보라. 조각상의 ‘질료인’은 당연히 조각가가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대리석 덩어리이다. 조각상의 ‘도구인’은 조각가가 조각상을 만들 때 도구로 사용하는 정이다. ‘작용인’, 곧 힘을 써서 작업을 수행하는 원인은 조각가이다. 그리고 ‘목적인’은 조각상이 만들어진 목적이다. 여기서 목적인은 조각가가 부유한 후원자에게서 그의 집에 전시할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를 받은 것이다. 목적인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바로 그 이유를 나타낸다. 철학자들은 목적인에 관해 또 하나의 사실에 주목했다. 즉, 실행할 때 마지막으로 실현되는 것이 의도의 측면에서 가장 먼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례에서, 조각가는 먼저 대리석 덩어리를 구해 작업실로 가져간다. 그러고는 종이에 조각상의 형태를 스케치하고, 여러 날 동안 정으로 대리석을 쪼아 가며 조각상의 형태를 서서히 잡아 간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완성된 조각상을 후원자의 집에 전시한다. 이때 조각상을 후원자의 집에 두는 마지막 단계가 처음에 의도했던 목적이다. 바로 그 목적이 조각상을 만드는 전체 작업을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목적인과 실행 과정에서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이 의도의 측면에서 가장 먼저 있었다는 개념은,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음으로써, 우리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하도록 이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기 전, 곧 창세전에 가장 먼저 마음에 두셨던 것은 무엇일까? 창조 세계를 바라볼 때, 특히 해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광경을 마주할 때, 하늘이 처음에는 보랏빛으로, 이어서 붉은빛으로, 마침내 밝은 노란빛으로 물들어 가는 그 다채로운 모습은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고, 우리의 마음을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운다. 시편 기자는 그런 경험을 담아 이렇게 표현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앞서 살펴본 조각가의 조각상 개념을 다시 떠올리면서,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담긴 장인의 솜씨를 생각해 보라. 조각상에 표현된 인물의 종아리에 나타난 힘줄, 손목의 곡선, 얼굴에 어린 사색하는 표정을 살펴볼 때면, 우리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로댕의 뛰어난 솜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솜씨를 발견한다. 그는 행성들과 찬란하게 빛나는 해, 달, 밝게 빛나는 별들이 펼쳐진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면서 경탄한다.

그러나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보다 더 크게 드러내는 것이 있다. 시편 기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내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그렇다면 사람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영광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 곧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는 데에 있다(시 8:6–8 참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창조 세계 전반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유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데 있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며, 우리가 창조된 바로 그 이유이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처음 창조하실 때 품으셨던 뜻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롬 5:12–21; 딤전 2:13,14 참고). 그러하기에 바울은 죄에 빠진 사람의 상태를 짧지만 날카로운 말로 기록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요 “인자 같은 이”(단 7:13; 눅 22:67–71 참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가리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는 그분이 아담과 달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 준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었으나 죄로 그 형상을 더럽혔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형상이시며, 순종과 고난을 통해 하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예수님은 순종과 고난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 자기 백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구원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구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49).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던 아담 안에서의 옛 삶, 곧 우리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게’ 하신다(엡 4:22 참고). 또한 성령은 우리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연합시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엡 4:23,24 참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되는 목적을 이루도록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곧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그분을 영화롭게 하게 하신다. 달을 생각해 보라. 달은 지구 주위를 도는 생명 없는 암석 덩어리로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원천이 없지만, 밤이 되면 찬란하게 빛난다. 그렇다면 달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태양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영광의 원천이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영광의 유일한 원천은 찬란히 빛나는 태양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셔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이며, 죄와 반역조차 좌절시킬 수 없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3,24).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고, 그 빛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그 영광이 빛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나타날 이와 같은 광경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의도의 측면에서 가장 먼저인 것이 실행에서 마지막으로 실현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종말의 계획을 지금 이미 실행하기 시작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지극히 사소한 행동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 너무 하찮은 것이란 없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제일 되는 목적을 이루는 삶을 미룰 것인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그 목적, 곧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뜻하신 바에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참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 주께서 주님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존 페스코

존 페스코

존 페스코(J.V. Fesko) 박사는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의 조직 및 역사 신학 교수이며 곧 출간될 책 The Christian and Technology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