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스러운 목적
2026년 10월 27일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2026년 10월 27일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만물의 제일되는 목적”의 두 번째 글입니다.
우리에게 목표는 중요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이 거창한 질문을 던질 때든,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이 작은 질문을 던질 때든, 우리는 마음 한편에 언제나 목적을 품고 있다. 삶의 목표가 선하든 악하든, 충분히 숙고한 것이든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이든, 인간은 목적론적 피조물이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교도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 관한 저서를 시작하면서, 모든 행위가 가치를 지니려면 반드시 목적이나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통찰력 있게 주장한다. 또한 그는 목적 하나하나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궁극적인 목적으로 귀결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모든 부차적인 목적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시는 까닭에, 사람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고 생명을 보존해 가신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죄인인 우리는 종종 나아갈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님이……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러나 “시초부터 종말을”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 자체뿐 아니라 존재의 이유까지도 창조하신다. 그런데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영원하시고 자족하시며 다른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가장 쉽게 빠져나가면서도 솔깃한 대답은 “그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여전히 그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선 자체이시며, 자신의 선하심을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기로 자유롭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교회도 흔히 그렇게 대답해 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면,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삼위일체적 영광을 나타내고 피조물에게 자신의 선하심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자유로운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끌어 갈 방향을 제시하며, 모든 부차적인 목적들을 한데 모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필연적인 존재이시다. 반면 창조 세계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시며, 세상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안에 어떤 영원한 결핍이 있어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같지 않으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시고, 자족하시며,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복되신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신자들의 “거처”(시 90:1)가 되시지만, 영원하시며 시간에 종속되지 않으신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하나님은 우연히 먼저 존재하게 되었거나 다른 존재들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신화나 소설 속의 신들과 같지 않으시다. 다른 피조물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강력한 피조물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과도 전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다. 우리가 존재의 사다리를 타고 낮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그 꼭대기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지만(렘 23:24 참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는 없다(왕상 8:27 참고).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영원토록 하나님이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결코 하나님이실 수 없다. 하나님만이 필연적인 존재이시며, 그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는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는 ‘무(無)로부터(ex nihilo)’, 곧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무’를 은연중에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홀로,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으로 확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곧 세상이 하나님의 일부가 되거나 하나님을 창조 세계 안에 가두어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창 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다. 작고한 신학자 존 웹스터(John Webster)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존엄성을 궁극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창조가 “피조물을 낮춘다”라고 결론짓는 데는 다소 주저하는 태도를 보인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바로 이것이 웹스터가 우려하는 점이다). 다만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낮아진다. 즉, 겸비해지는 것이다. 창조는 무엇보다도 우리나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를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 관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창조 신학을 인류학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온 땅에 위엄 있게 드러나게 하자. 또한 그분을 예배하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분의 지극히 높은 자유 안에서 겸손히 기뻐하자.
하나님은 자신의 삼위일체적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파악하고 나서, 왜 창조하셨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웹스터는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숙고하지 않은 채 “곧바로 창조를 삼위일체적 사역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적절히 지적한다. 하나님은 성경의 이야기가 상당히 전개된 후에야,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는 성부의 사역을 통해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계시하신다(요 14:26; 15:26 참고). 그러나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하나님은 그 이전부터 성경 곳곳에서 자신의 삼위일체성을 암시하신다. 창세기 1장 1,2절은 이미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성령을 소개한다. 그리고 시편 33편 6절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말한다. 지면이 부족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 사역과 그 목적을 이해하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간략히 살펴보아야 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세 위격은 하나님의 일부분이 아니라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지 않으신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고찰하는 신학은 경륜, 곧 하나님의 사역을 고찰하는 일보다 앞선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은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세 위격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일하시면서 동시에 존재의 질서(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를 드러내신다. 분리되지 않고 함께 사역하신다고 해서 각 위격 사이에 합당한 구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니케아 신경은 우리가 이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와 함께 성령을 내보내시며,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고 불리신다. 그러나 성부는 그분에게서 나신 성자를 통하여 일하신다. “모든 것이 그[성자]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는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방식을 살피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반영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단일한 사역으로 이루어지며, 이때 사역의 기원과 실행과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삼위 각각의 역할이 합당하게 강조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말해 주는가? 성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몇 가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창세기 1장 1,2절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몇 가지 단서를 연결해 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자는 존재론적으로 창조주이시다. 바울은 창조의 목적으로 눈을 돌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성자로 말미암아 성자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는 죄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과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이 모두 포함된다. 하나님은 유기된 자들을 그들의 죄로 인해 정죄하심으로써 자신의 진노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택함 받은 ‘긍휼의 그릇’을 위해서는 ‘그 영광의 풍성함’을 드러내신다(롬 9:22,23 참고). 모든 죄가 진노를 받아 마땅하지만(살후 1:8 참고), 성령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하여 사람들을 책망하신다(요 16:9 참고). 하나님께서 성자로 말미암아 성자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그 성자를 거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거스르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스도 위에는 여호와의 영이 머무르신다(사 11:2 참고). 또한 심판의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사 11:4; 살후 2:8 참고)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고 예배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자신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목적에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는 일이 포함되지만, 논리적 순서를 보면 진노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누어 주는 일이 우선한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피조물 안에, 그리고 그들에게 선하심을 베푸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세상을 창조하셨다. 개혁파 스콜라 신학자인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는 『참된 신학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True Theology)의 끝부분에서, 하나님을 연구하고 아는 지혜인 신학에는 주된 목적과 부차적인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학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부차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신학을 마련하셨다. 이와 같이 올바른 신학적 의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웹스터가 표현한 대로, 하나님은 “지극한 관대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심과 정죄하심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라는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이 목적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바로 이것이 말씀으로 말미암은 창조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역 안에서 하나님께서 중점을 두시는 목적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7장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에서는, 피조물에게 선하심을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너무나 강렬하게 묘사된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 커서”, 인간은 감히 하나님을 “자신의 복과 상급”으로 삼고자 바랄 수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아담이 단지 피조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했던 순종에 대해 생명을 약속하심으로써, 언약적 선물을 통해 넘치도록 풍성하고 관대한 선하심을 보여 주신다. 아담이 하나님의 선물을 저버리고 자신과 모든 후손을 파멸에 빠뜨린 후, 곧바로 하나님은 은혜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과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 3:15 참고).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은 유언, 곧 마지막 유언으로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상속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모든 유업을 받게 된다(히 9:15–17 참고). 모든 언약은 관계를 확립하는 합의이지만, 일부 언약은 유언의 성격을 띠게 되어, 그 언약에 따른 약속을 매우 일방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언약의 조건들을 충족하고 약속을 이루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으며, 구약의 모든 제사와 제사장과 예언과 표징과 성소가 이 사실을 확증한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사, 성자로 사람이 되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하게 하셨을 때(마 1:21 참고), 그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충만하고 분명하고 영적으로 효력있게 모든 나라, 곧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베풀어 주셨다. 이러한 ‘영적 효력’은 성령께 달려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8절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값 주고 사신 구속을 그 택하신 자들에게 “확실하고 효력 있게” 적용하시며, 그들을 믿음으로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고 설명한다.
잠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선하심의 장대한 전경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그 창조를 통해 드러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의 이야기를 더없이 매력적이고 숨 막힐 정도로 경이롭게 만든다. 창조 교리를 인류학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가?”라고 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창조를 신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존하시며 스스로 복되신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 특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반역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에게든 자신의 선하심을 이토록 풍성하게 베푸셔야 하는가?” 그 유일한 대답이 다음의 말씀에 나타난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시 119:68).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를 깨달아 겸손과 감사로 그 안에서 기뻐하며, 그분을 섬기고 예배해야 한다.
결론
우리는 삶의 목표에 매몰되곤 하는데, 그러한 목표는 대개 근시안적이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점을 포착했다. 즉, 우리에게는 모든 부차적인 목적을 하나로 묶을 궁극적인 목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 세계에 목적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것을 깨달을 수 있고, 또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이 질문에 신중하고도 겸손한 태도로 답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라는 대답도 완전히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는 이 세상이 필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본성에 걸맞게 행하신다. 곧 그분의 사역에 삼위일체적 영광의 흔적을 남기시고, 존재할 필요도 없고 창조주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없는 피조물에게 자신의 선하심을 나누어 주신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그 목적이 이루어질 종말을 향해 나아가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구속받은 피조물을 성자 안에서 그들의 근원으로 다시금 인도하신다. 이는 성령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들을 이끌어 그리스도를 “그의 참모습 그대로”(요일 3:2) 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것과 같다(마 5:8 참고).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복되게 낮추며, 구속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없이 높여 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피조물이 삶의 방향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이유가 된다. 창조를 깊이 생각하는 피조물은 먼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요 17:3)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임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참으로 그분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시 29:2 참고)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라고 고백하게 되는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충만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보다 더 고귀한 것이 무엇이며, 이보다 더 높은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