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증인으로서 자녀를 훈육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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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06일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의 생애와 사역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천국 생활 매뉴얼: 산상수훈”의 열 네 번째 글입니다.
로버트 스미스 캔들리시(Robert Smith Candlish)가 알렉산더 무디-스튜어트(Alexander Moody-Stuart)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스코틀랜드 교회 복음주의의 거인이었는데, 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오래된 대화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기록하였다. 캔들리시는 무디-스튜어트에게 던디(Dundee)의 주목받은 목사,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맥체인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에게는 은혜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라고 캔들리시는 말했다.
은혜의 트로피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1813-43)은 그가 사망한 이후 거의 두 세기 동안 캔들리시를 사로잡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기독교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 젊은 목사를 그들이 만난 사람 중 가장 “예수님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맥체인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시는 주권자이신 주님에 대한 증거를 관찰하는 것이다(딤후 1:9).
하나님의 은혜는 맥체인의 삶이라는 태피스트리 속에 깊게 짜여진 실과 같은 것이다. 어두움에서 맥체인의 영혼을 변화시킨 은혜는 그를 좋은 소식, 즉 복음 사역자의 삶을 살게 하였다.
은혜에 의한 구원
1813년에 아담(Adam)과 록하트(Lockhart) 맥체인 부부에게 태어난 로버트는 다섯 자녀 중 막내였다. 처음부터 로버트는 학업에 두드러진 능력을 보여주었고, 항상 그의 클래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아담은, 4살이 된 로버트가 병에 걸렸을 때, 회복하는 동안 재미 삼아 그리스 알파벳을 배우던 모습을 회상하며 즐거워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버트는 체조, 시, 스케치 그리기, 그리고 독서에 흥미를 느꼈다. 맥체인의 모든 노력에는 자연적인 재능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에 영적인 은혜는 없었다.
맥체인 가족은 로버트의 어린 시절 동안 스코틀랜드 교회의 여러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로버트는 교리 수업에 충실히 참석했고, 그의 친구들은 나중에 그가 성경 구절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대한 답변을 명료하고 달콤하게 읽던 모습을 회상하였다. 그러나 공적인 경건함이 내면의 자기 의를 가렸다.
맥체인은 나중에 그의 초기의 종교적 헌신을 “생명 없는 도덕성”으로 평가하였고, 이 시기를 “순수한 도덕성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시기라고 생각했다.
로버트는 모든 형제들과 친밀했지만, 특별히 그의 큰형, 데이비드는 롤모델이자 멘토였다. 로버트는 데이비드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데이비드의 영혼은 참된 회심을 경험했고, 그의 예리하고 영원한 실재에 대한 인식은 로버트의 자만심을 질책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내가 장난치거나 춤추거나, 혹은 좀 어리석은 모임에 나가려고 옷을 입을 때,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려고 옷장 문을 닫는 형의 모습을 본 것을 기억한다.”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데이비드는 로버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게 하는 인간적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로버트가 자신의 죄를 완전히 깨달은 것은 데이비드의 삶보다는 그의 죽음 때문이었다.
1831년 7월, 데이비드는 심한 열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데이비드가 천국으로 간 지 11년 되던 해에, 로버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11년 전 이 날, 나는 내 사랑하는 형을 잃고, 바로 죽지 않는 그 ‘맏형’을 찾기 시작했다.” 로버트는 진리를 찾는 과정 속에서, 원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첨부된 짧은 신학 저술이었던 <구원 지식 요약>The Sum of Saving Knowledge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은 하나님께 용납되는 방법을 선포했고 맥체인에게 믿음의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친구들도 로버트 안에 일어난 분명한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는 곧 교회에서 제공하는 토요 교실, 성경 읽기 모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잔치와 같은 모임에 열심으로 참여하였다.
로버트의 사역에 대한 부르심은 회심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몇 주 후, 로버트는 에든버러 노회 앞에서 목회 공부에 대한 그의 열망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연구
1831년 11월, 로버트 맥체인은 에든버러 대학교의 번창하던 신학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탁월한 시기의 토마스 찰머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찰머스는 신학 과정을 가르쳤으며, 젊은 청년이었던 맥체인을 가까이에 두고, 신학적, 목회적, 영적으로 훈련시켰다.
맥체인은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 있어서 자라났다. 그의 경건함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능력이 무르익을 수록 더욱 깊어졌다. 맥체인의 일기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삶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나에게는 주인의 시간을 도둑질하고 남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때를 아끼라” 그는 나에게 외치고 있다.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순간이 하나도 없어! 그런데 이 24시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잖아.
아, 마음과 지식이 형제자매처럼 서로 의지하며 함께 성장하길!
아, 진실하고 가식 없는 겸손이여!
더 풍성한 사역을 갈망한다. 오,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주셔서 나에게 복음의 직무를 맡겨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음의 시대는 맥체인이 신학교 공부를 마치자 마자 도래했다.
은혜의 사역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1835년 가을에 존 보나르(John Bonar)의 조교가 되었다. 보나르는 라버트(Larbert)와 두니페이스(Dunipace)의 통합 교구 목사였다. 맥체인이 보나르 아래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수많은 설교 기회를 얻었고, 그의 미래 목회의 특징인 심방 목회의 패턴을 확립했다. 보나르는 열정적인 목회자였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혼과 가정을 매일 방문했다. 로버트는 부모님께 사역의 어떤 부분보다도 심방하는 것이 즐겁다고 이야기했다.
1836년 봄, 던디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는 그들의 초대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로버트 캔들리시는 맥체인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맥체인이 던디를 방문하기에 좋은 시기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1836년 8월에 로버트는 아가서 2:8-17절을 가지고 담임 목사에 지원하는 설교를 했다. 교회는 즉시 맥체인의 재능과 고상한 성품을 알아보고, 만장일치로 맥체인을 목사로 청빙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로버트 맥체인은 이후 3년 동안 던디에서 1,100명의 청중들에게 매 주일에 두 번씩 설교하며,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다. 그는 열 명의 장로를 임명했다. 목요일 밤에 기도회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는, 이 기도회에 800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여름에는 교회의 찬양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주 “찬양 모임”을 개최했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의 횟수를 연간 두 번에서 네 번으로 늘린 것은 실제로 더 획기적이었다. 1837년에 맥체인은 어린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안식일 학교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250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참석하는 화요 성경 공부 모임도 만들었다.
눈에 띄는 사역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맥체인의 마음속에서 갈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부흥에 대한 열망이었다. 1836년부터 맥체인은 그 땅의 부흥을 위해 설교하고 기도했다.
1839년에 주님은 로버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맥체인이 그 도시를 떠나 있을 때,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해 초에, 맥체인은 곧 유명해질 “성지 탐방 사역”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가 임명한 성지 탐방 위원회의 임무는 유대인 선교 활동을 위해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버트는 자신을 대신해서 성 베드로 교회의 설교단에 윌리엄 찰머스 번즈(William Chalmers Burns)를 세웠다. 번즈는 비록 어렸지만, 눈에 띄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맥체인은 오랫동안 자신이 없을 때 부흥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때때로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성도들에게 큰 축복이 내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창 노력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시기도 한다. 그것은 ‘내 손과 내 웅변이 이것을 이루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라고 맥체인은 덧붙였다.
던디 부흥은 1839년 8월, 번즈의 사역을 통해 시작되었다. 교회 모임은 몇 달 동안 매일 밤 열렸다. 맥체인이 돌아왔을 때는, 마치 온 도시가 깨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주권적인 구원과 성화의 역사하심이었다.
맥체인은 사역 말미에 복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그는 부흥의 기쁨을 확장하는 데 노력하였고 교단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여러 곳으로 전도 여행을 다녔는데, 전도 설교에 보람을 느껴 순회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1843년 3월 초에 맥체인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3월 25일, 로버트는 병상에서 누워 축도하듯 손을 들었고, 그 후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은혜로 살기
목회자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는 동안, 성 베드로 교회의 방문자가 보낸 편지가 읽히지 않은 채로 로버트 맥체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의 죽고 난 한 주 뒤에 누군가가 그 편지를 열었다.
당신에게 몇 줄의 글을 보내는 이 낯선 사람을 용서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나는 당신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가 나의 영혼에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내용보다는 당신의 말하는 방식에 감동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전에 본 적 없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빛나는 삶과 사역의 능력은 모두 은혜의 결과였다. 맥체인은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그리스도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맥체인은 “당신을 위한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은혜의 바다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외쳤다. “뛰어들고 또다시 뛰어들어도 그 깊은 바닥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맥체인은 특히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끊임없는 기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그 깊이를 탐구했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증거일 뿐이었다. 맥체인은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초자연적인 은혜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토였던 그의 삶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는 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