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정의, 그리고 진노
2023년 11월 04일전능하심
2023년 11월 07일편재성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오해된 하나님의 속성”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우리가 그분을 경험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편재성은 또한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무한하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경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편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만, 오히려 그런 한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다. 우리의 환경은 변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시편 139:7-10, 예레미야 23:23-24, 로마서 8:38-39의 가르침이다. 하늘과 땅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그곳에 그분도 존재하신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이 함께 계시지 않고 만날 수 없다면, 우리를 구원하고 보호하겠다는 그분의 약속은 공허하며 우리의 관계에는 결핍이 있을 것이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분을 의지할 수 있겠는가? 일부 기독교인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의문을 품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멀리 계시며 우리를 잊으신 것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진정한 영적 경험이며, 우리는 그런 경험을 무시하거나 그 중요성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닫았을 수 있다. 단지 그분만이 아시는 이유로 그분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걷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극한까지 시험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우리 삶의 깊은 곳에서 일하고 계실 수도 있다. 그분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우리를 형성하고 인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해 오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셨지만(마 27:46, 막 15:34), 우리는 성부가 그분과 함께 계셨고, 고난의 끝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의 보살핌에 자신을 맡기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눅 23:46). 그분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사실이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인식할 수 없더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도 적용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르며 무한히 뛰어나시다.
하나님의 편재는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범신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이론은 더 미묘하게는 범재신론이라고도 부르며 모든 것이 신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연장(extension) 없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다는 믿음이다.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은 공기 또는 일종의 기체와 같아서 세상에 스며들어 우리의 감각으로 설명하거나 감지할 수 없더라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과 유사하다.
이런 종류의 접근 방식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물의 본질의 차이를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자신의 연장으로 만들지 않으셨으며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스며들지 않으신다.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르며 그분의 본성은 피조물의 본성과 다르다. 물질적 우주보다 하나님을 더 닮은 영적 피조물(천사와 악마)조차도 유한하며 그런 점에서 그분과는 상당히 다르다. 인간인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된 질서 속에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 1:26-27)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유한한 개념을 사용하여 그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유비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념적 틀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르며 무한히 뛰어나시다.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자신의 이름을 두셨다고 진술하는 많은 주장은 더 문제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다른 곳보다 그곳에 더 많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세오경(출 20:24, 신 12:5)뿐만 아니라 역사서(대하 6:6)와 선지서(합 2:20)에서도 이런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주로 예루살렘을 지칭하는데,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신 도시, 특별히 성전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하박국은 아주 분명하게 주님께서 거룩한 성전에 계시며 온 땅이 그분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사야 66:1절은 성전이 하나님을 담을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런 조건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하박국과 모순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장소, 특히 성전을 자신의 축복과 임재가 거하고, 자기 백성에게 경배를 받으시며,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장소로 지정하셨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는 그분이 다른 곳에도 똑같이 임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만 임재하시고 다른 곳에는 임재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이지, 하나님이 한 곳에 임재하시고 다른 곳에는 임재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우리 정신의 제한된 개념적 능력을 반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존재의 실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영원히 초월적인 자아 안에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편재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처럼) 그분의 편재성은 그분의 무한성을 실제로 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감소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이해되도록 고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