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정의, 그리고 진노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비피동성
2023년 10월 31일
편재성
2023년 11월 04일
비피동성
2023년 10월 31일
편재성
2023년 11월 04일

사랑, 정의, 그리고 진노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오해된 하나님의 속성”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길을 걷다 젊은 깡패가 나이 든 할머니를 때리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지갑을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깡패는 지갑을 뺏으려고 계속해서 때리고 있다. 쉐퍼는 “이런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묻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악한) 깡패를 제압하고 (무고한) 할머니를 구출(사랑)하는 데 필요한 힘(의분)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과 정의, 선함과 거룩, 은혜와 진노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들은 상호 의존적이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순전히 보복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춘다(시 85:10).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의를 추구하도록 만든다.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대변하며, 그들을 위해 복수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익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위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단순성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지만, 사실 완벽하게 조화롭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에게 여러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광스러운 신성한 본질이 있는 것이다. 고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할 때 신성한 단순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모든 속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일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단일하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분리되지 않으며, 단일하고, 혼합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몸도, 지체도, 욕정도 없으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여러 지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개별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우리의 추론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청교도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는 “하나님 안에는 많은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속성이 있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신성한 본질은 그 자체로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부른다”라는 고전적 유신론의 견해를 표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attributa divina)은 하나님의 본질(essentia Dei)과 분리될 수 없다.

신성한 속성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더 부드럽거나 더 가혹하다고 인식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사랑과 진노, 자비와 공의는 어떤 관계일까? 토론과 논쟁에 휩싸여 있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성경과 대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에 의견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에게 여러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광스러운 신성한 본질이 있는 것이다.

사랑 그 이상

첫째,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또한 사랑 이상이시다. 옛날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사랑을 포함시켰다.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이 “속성의 최상위”라고 부른 하나님의 선하심은 분류 체계에서 속(屬)이고, 사랑, 은혜, 자비, 친절, 인내는 종(種)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류 방법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을 배제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요일 4:8).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 하지 않았다. 주어와 서술어를 바꿀 수 없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빛”(요일 1:5)이시며,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경우에 동일한 문법 구조가 사용되었다. 요한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또한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요일 1:9). 19세기 장로교인 J.W. 알렉산더는 “하나님은 무한히 자애로우시지만 무한한 자애가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로운 사랑이고, 그분의 공의는 사랑의 공의이다. 하나의 속성이 나머지 속성을 압도하거나 무효화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사랑이 없는 것처럼 가혹하게 정의롭지만, 또 정의가 없는 것처럼 강렬하게 사랑하신다.”

사랑의 정의

둘째, 성경이 사랑을 정의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도덕성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심판의 날을 없애고 지옥 불을 끄기 위해 “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 범주를 완전히 내버린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결코 그러실 리가 없다”라는 그럴듯 해 보이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결코 제시하지 않으실 것 같은 생활방식으로 구별하거나 그런 도덕적 요구 목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며, 내가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으시며, 나의 행동을 비난하지도 않으시며, 내가 선택한 정체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이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을 항상 받아 주기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정형적인 이해와 거룩한 말씀에 얽매이지 않는 개념으로 재정의된 것이다. 사도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이것은 아가페 사랑을 말한다. 카리타스(caritas)나 아모어(amor)가 아니다. 자신을 내어준 희생적인 사랑이지 로맨틱하거나 에로틱한 사랑이 아니다. 감상적이거나 비판 없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별하는 사랑며 바로잡는 사랑인 동시에 의로운 사랑이다.

성경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지만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출 34:6~7).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고 말했다(롬 11:22).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시다면 그분은 선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눈감아 주고 악에 무신경하시며 불의를 관용하시고 무죄한 자를 불경건한 자의 손에 맡기신다면, 구원하시지도, 복수하시지도, 정당성을 입증하지도 않으신다면, 악인과 영원히 구별하지 않으시고, 같은 공간, 같은 운명, 같은 보상, 같은 형벌을 내리신다면, 하나님은 선하지도, 친절하지도, 의롭지도, 거룩하지도, 공의롭지도 않으신 것이다. 이안 해밀턴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관대하지 않으며, 그럴 수 없다. 마치 그분의 공의와 거룩함이 차갑고 독단적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공의가 필요하다.

사랑으로 기울다

셋째, 하나님은 사랑의 경향이 더 크시다.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이 사랑으로 가려져서는 안 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보다 더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가혹하게 표현되는 다른 성품보다 사랑하기를 더 원하신다. 우리는 지금 언어를 확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은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 사랑과 공의가 하나님의 본성이나 의식 안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 또는 “인애”(히브리어로 헤세드)를 “기뻐하시”며 또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신다”고 말한다(미가 7:18).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진노보다 자비로 기우신다. 가혹한 행위는 오히려 그분에게서 축출된다.” 성경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며 “너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고 가르친다(애 3:33; 신 7:6~7 참조).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속히 용서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편 103:8; 출 34:6 참조).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비상”(사 28:21)하다고 불렀고 신학자들은 ‘오페라 에일레나’ 곧 기이한 사역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마지못해 재판하시는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은 분노와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시기보다는 사랑, 즉 친절과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경향이 더 크시다. 사랑의 표현은 진노의 표현보다 하나님의 성향이나 본성의 방향을 더 많이 드러내며, 하나님의 선호를 더 많이 보여준다. 청교도인 윌리엄 거날(William Gurnall)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을 움직이게 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표현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내든, 항상 부족하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하나님을 포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은 갈보리 산에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테리 존슨
테리 존슨
테리 존슨(Terry L. Johnson) 목사는 조지아주 사바나에 위치한 인디펜던트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The Case for Traditional Protestantism and Reformed Worship』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