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2026년 10월 27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
2026년 10월 30일허무주의적 세상에서 목적을 찾는 것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만물의 제일되는 목적”의 네 번째 글입니다.
현대 문화는 삶에 본질적인 의미가 없다고 믿는 허무주의를 기웃거리고 있다. 세속 사회에서 종교적 믿음이 쇠퇴하고 전통적인 기독교적 토대가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불안과 우울과 절망이 증가하는 현상은 이런 공허함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기독교 안에서 교제하는 데 참여하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사회적 고립이 더욱 심해졌으며, 많은 사람이 삶을 물질주의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현대인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 얼마나 헛된 노력인지를 드러낸다.
허무주의의 뿌리
현대 허무주의의 철학적 뿌리는 깊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사회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면 모든 의미와 가치 역시 파괴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니체는 「광인」(Parable of the Madman)에서, 신이 사라지면 인류가 “끝없는 허무 속을 헤매는 것처럼” 길을 잃고, 의미도 목적도 없는 실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세기에 이르러,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같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신을 거부함으로써 생겨난 공허함과 깊이 씨름했다. 사르트르는 신 없는 우주에서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가르쳤다. 이는 우리가 본래 정해진 목적 없이 세상에 오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삶의 부조리를 직면한 카뮈는 자살이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삶에 객관적 의미가 없다면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안락사와 낙태가 증가하는 세태에서 드러나듯, 허무주의는 더 광범위한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 니체, 사르트르, 카뮈, 이 세 사상가는 공통적으로, 신이 없다면 객관적 진리와 궁극적 목적이 사라져 인류가 실존적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이와 같이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태도는 도덕적 상대주의, 곧 ‘너에게 참인 것이 나에게는 참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급진적 개인주의라는 형태로 더 넓은 문화에 스며들었다. 이제 초월적 권위에서 벗어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정립하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율성을 추구하는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동산에서 있었던 최초의 유혹, 곧 “너희가……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약속은 언제나 타락한 인간을 유혹했지만, 거기에 넘어가면 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소위 자유라고 불리는 완전한 자율성은 실상 무의미함이라는 감옥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자족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생명과 진리와 목적의 근원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그 대가로 허무함만 마주할 뿐이다.
성경적 답변: 만물의 목적
허무주의라는 암울한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복음은 소망을 제시한다. 성경은 생명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목적과 의도를 담아 창조하신 것이라고 선언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창 1:1 참고).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 답변은 심오하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가운데 즐거워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억압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가장 깊은 만족감으로 이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어서 그는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붙드시는 중심이시다. 또한 바울은 다른 본문에서 이렇게 외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 11:36). 허무주의에 대해 성경은 초월적인 목적이 존재한다고 답한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 목적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로마서 1장에서 설명하는 바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다(21절 참고).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지혜롭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다(22절 참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된 것과 맞바꾸면, 결국 헛됨, 곧 비극적인 공허함만 남는다. 이는 현대 허무주의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소망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래 목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부활은 허무주의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제시한다. 베드로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으로 치닫는 이 삶을 초월하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는 승리를 확보하셨고, 이제 우리가 하늘 처소를 향해 힘써 나아가는 가운데 영원한 목적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담긴 영원한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전 10:31 참고). 부활은 우리가 수고하는 것이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확증한다(고전 15:58 참고). 즉,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중요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허무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응
그리스도인은 허무주의적 절망에 깊이 빠진 문화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먼저, 허무주의가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허무주의는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누구도 한결같이 자신의 선택과 인간관계가 정말로 무의미한 것처럼 살지는 않는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지적하듯이, 현대인은 이론적으로는 우주에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의미와 가치를 향해 ‘도약’하는 모순된 삶을 산다. 목소리 높여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사랑과 정의, 존엄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전제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세계관으로는 그 실재를 뒷받침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이와 같은 모순을 온유하게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절망에 맞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진리를 일깨워 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한편 지적인 논증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대응할 수 없다. 절망에 빠진 마음에 다가가는 첫 번째 다리는 철학이 아니라 흔히 “온유와 두려움으로”(벧전 3:15) 베푸는 친절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과 목적에 굳게 뿌리내린 삶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증거가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빛을 마주할 때, 허무주의는 설득력을 잃는다.
그리스도인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관계에 중점을 두고 허무주의에 대응해야 한다.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 앞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살아 있는 해답으로 제시하신다. 곧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친히 이끄시는 구주로 자신을 내주신다. 성경은 인생이 ‘헛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존재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구속 계획을 밝히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결코 버림받지 않도록 하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참고. 막 15:34; 시 22:1)라고 부르짖으셨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분은 절망과 죽음이 영원히 패배했음을 선언하셨다.
절망하는 이들과 대화할 때, 우리는 그들이 삶의 의미를 갈망하게 된 것이 잔혹하게도 우주에서 일어난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사실이 아님을 온유하게 일깨워 줄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을 주셨다고 증언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에 허무주의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을 심어 주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락한 본성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억누르고, 오직 그분만이 홀로 주실 수 있는 참된 만족을 다른 모든 것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이 갈망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만 이룰 수 있는 목적이 우리 속에 쉼 없이 되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절망을 짊어지셨으며, 부활하심으로 그 절망을 이기셨다.
허무주의가 초래하는 가장 잔혹한 결과 중 하나는 관계의 단절이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 중요성을 잃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립된 채 방황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믿음의 공동체로 다시금 이끌어야 한다. 허무주의는 공허함만을 안겨 줄 뿐이지만, 신자들과 나누는 교제는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삶의 목적을 일깨워 준다. 우리의 주된 임무는 철학적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소망과 삶의 의미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허무주의적 세상에서 목적을 따르는 삶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은 확고하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곧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자율성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참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때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거짓되게 말하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만 우리가 창조된 참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소망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로서, 삶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이 사실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분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목적 없이 방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종착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 고백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못하는 마음은 안식을 얻고, 헤매는 영혼은 집을 발견하며, 방황하는 삶은 닻을 내린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