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무주의적 세상에서 목적을 찾는 것
2026년 10월 30일
예배와 세상의 종말
2026년 11월 03일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만물의 제일되는 목적”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 전체를 가장 선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4,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복음은 너무나 강력하여, 우리가 이전에 추구했던 삶의 방식, 곧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며 자기 왕국을 세우려 했던 방식을 뒤흔든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자신의 탁월한 찬송가에서 이 사실을 잘 표현한다.
“주님께 고통을 안겨 드린 나를 위해 주님께서 죽으셨단 말인가?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나를 위해?
놀라운 사랑이여!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다니!”
이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요일 4:19 참고). 이 사랑은 우리가 더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강권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그 사랑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시 63:3; 행 20:24 참고). 아이작 왓츠(Isaac Watts)가 표현한 대로, “나를 가장 매혹하던 헛된 모든 것들을 주님의 보혈 앞에 모두 내려놓는다.” 성령은 우리가 고통스럽고 불편하더라도 자신만을 위한 일과 야망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신다. 신약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과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이제는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한다(갈 2:20 참고).
우리는 이처럼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된다(고후 5:9; 딤후 2:4 참고). 즉,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부터 사람들과의 관계, 친구 관계, 직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집에는 손님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출입 금지’ 구역으로 정해 둔 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출입하지 못하실 영역이 전혀 없다. 우리는 몇몇 생각만이 아니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고후 10:5 참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세상과 육신과 마귀는 여기에 반발하여,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확실히 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독교’가 되어 버리고, 무언가를 잘못할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사탄이 동산에서 사용했던 계략이 바로 그것이다. 곧 하나님을 좋은 것을 주지도 않으시고, 친절하지도, 사랑이 많지도 않으신 분인 양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은 죄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작은 글씨로 쓰인 중요한 내용은 감추어 버린다. 즉, 죄가 언제나 속이고 죽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잠 9:13–18 참고). 존 번연(John Bunyan)이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묘사하듯이, 세상은 우리에게 천국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계속하기보다 ‘허영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이 세상을 보물처럼 여기라고 속삭이면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주장과는 달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은 자유와 기쁨을 준다. 우리는 “종의 두려움이 아니라 자녀다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에 따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1).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곧 모든 일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을 때 아이가 곧바로 그것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기쁘게 누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딤전 4:4 참고). 그리스도인은 음악을 즐기면서 청각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심을 의식하고서 예술을 창작하고 즐긴다. 체스를 두는 사람은 복잡하고도 정교한 체스 전략에 감탄하며, 그 어떤 컴퓨터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아시고 가능한 모든 수의 조합을 아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운동 경기를 하면서, “주님, 제가 이기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님,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이 능력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패배할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승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노예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운동 경기 자체를 즐기게 해 준다. 우리는 자신의 성취를 근거로 존재 가치를 찾지 않으며,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안식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한마디 말하기도 전에, 어떤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지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우상처럼 갈망하는 것들을 얻으려고 자기 힘으로 분투하는 대신,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안식하게 한다(약 4:1–7 참고). 우리는 직장에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한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한 방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일한다.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더욱 복되게 하거나 자신이 섬기며 영적으로 양육받을 수 있는 교회 가까이에 살기 위해, 소득이 더 적거나 사회적 명망이 더 낮은 직업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실하게 살고자 힘쓴다. 우리는 우리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을 섬긴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의 수고가 열매 맺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행하는 모든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시 127:1; 고전 15:58 참고).
결혼한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은 배우자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와 혼인 언약을 맺으셨으며,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신다. 우리는 바로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엡 5:25 참고). 젊은 시절부터 함께한 배우자가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었을 때, 희생적으로 배우자를 돌보는 연로한 성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놀랍게 증언하는지 모른다. 결혼 생활에서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을 추구하면 성생활마저 변화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사실을 믿고 깨닫게 하신다. 본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 있는”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바로잡아,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히 여기게 하신다. 이것은 친구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친구 관계는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과 같이 무언가를 얻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통해 복을 받는 동시에 그들에게 복을 끼치는 기쁨의 소명이다.
또한 우리는 여가 시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행동을 금지하지도, 명령하지도 않는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하려고 힘쓴다. 하나님은 인간을 쉼이 필요한 존재로 지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의 수고를 감당하기 위해 쉬면서 새 힘을 얻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잠이 필요하듯, 안식하고 예배하는 날도 필요하다. 우리는 먹고 자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충실히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고자 힘쓰며, 맛있는 음식과 필요한 쉼을 주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면서 자기 몸을 돌본다. 이때 우리의 동기는 허영심이나 수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 생명을 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분의 영광과 신실하심, 자신을 내주는 선하신 사랑을 볼 수 있는 무대로 만드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 본향으로 데려가실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자주 실패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선물을 소홀히 여기거나 잘못 사용하고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정당하게 사용하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누릴’ 기회를 스스로 빼앗기도 한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2문 참고).
그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짐처럼 느껴질 때,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모세와 더불어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부르짖으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히 11:25)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는 하늘의 큰 무리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을 다해 즐거워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0문).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복음, 곧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자비하심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하는 효과적인 동기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롬 12:1).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언제나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실제로 부담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인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연료로 삼는다(느 8:10 참고).
감사하게도 장차 영광스러운 그날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실패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충만하게 즐거워하면서 완전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8문).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