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
2026년 10월 30일예배와 세상의 종말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만물의 제일되는 목적”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이사야는 예언서 서두에서 수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전에 모여드는 날을 내다본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 2:2).
이 구절의 맥락은 분명 예배와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전”은 예배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전에서 이루어지는 주된 활동이 예배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전”은 성전을 말하지만, 지금 이사야는 예배 공동체가 너무나 커져서 하나님의 전이 물리적인 건축물을 넘어 확장되는 날을 바라본다. 즉, 산 전체가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높은 산, 곧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산을 언급하는 것은 이교도들에게 예배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이교도들은 ‘산당’을 신들이 거하는 곳이자 그 신들을 숭배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이사야는 그날이 오면, 이교도들도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산당은 보잘것없는 언덕에 불과해질 것이다. 반면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그 광대하심과 능력과 위엄으로, 신이라 일컬어지는 다른 모든 존재 위에 우뚝 서 계시듯이, 시온산은 다른 모든 예배 장소 위에 높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어서 예배로 나아오라는 위대한 부름이 울려 퍼진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다른 이들에게 여호와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자고 권하는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3절). 그 결과는 놀랍고도 초자연적이다.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2절). 모든 족속과 나라에서 온 백성들이 한데 모여 강물처럼, 그러나 강물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의 산을 향해 흘러 올라간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이끌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교회는 왜 함께 모여 예배하는가? 우리는 주일마다 무엇을 하며, 그 모든 일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유익한 답을 내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사야의 환상이 가르쳐 주듯이(미가서 4장에서 미가도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예배를 종말론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 만물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이해할 때, 예배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화(榮化)는 지금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의 의미를 밝혀 준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예배: 영광의 전조
첫째, 우리가 장차 영광 가운데서 주로 하게 될 일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함께 드리는 예배는 천국에서 드릴 예배를 미리 보여 주는 일종의 전조 또는 서곡과 같다. 시편을 제외하면, 요한계시록이 성경에서 노래가 가장 많이 담긴 책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요한이 지극히 높은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종말을 엿보게 되었을 때, 그는 예배하는 자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창조하셨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DNA에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섬기고 공경하며 찬양하려는 본능을 심어 두셨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실로 본성적으로 신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그와 같은 인식은 세상에서 종교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우상숭배를 낳는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무리 야만적인 나라나 미개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확신이 뿌리내리고 있다. 삶의 다른 측면에서는 짐승과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 여전히 종교의 씨앗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그 어느 지역이나 도시도, 한마디로 그 어느 가정도 종교 없이 지냈던 적이 없었다. 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기독교 강요』, 1.3.1).
물론 칼빈은 사도 바울에게서, 특히 로마서 1장에서 그 실마리를 얻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도 예배하려는 본능은 약해지지 않았다. 다만 그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바울은 사람이 본성적으로 불의로 진리를 막으며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말한다(롬 1:18,25 참고). 정리하자면, 진리를 막을 수는 있어도 예배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 가운데 온전하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이 본래 해야 했던 그 일을 할 것이다. 곧 단지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천국에는 진심으로 예배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계 15:3,4).
영광 가운데 드리는 예배에서도 구속이라는 주제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계 5:9,10 참고). 하나님은 그분을 예배하도록 우리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예배하도록 우리를 구속하셨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 이 사실을 시사하신다. 그분은 이사야의 예언에 나오는 몇몇 주제와 맞닿아 있는 그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이 부분적으로 이사야의 환상을 성취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땅의 성전을 헐러 오셨다(요 2:19 참고). 그리하여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이 참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게 하셨다. 바로 이것이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이다. 즉, 아버지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여 참된 예배자로 세우고자 하셨다(롬 6:17,18; 12:1; 딛 2:11–14 참고). 즉, 구속은 예배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하러 나아오는 것이 곧 영원을 준비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영광 가운데서 영원토록 하게 될 일을 매주 몇 시간 동안 미리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공예배는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운동선수가 경기를 연습하듯이, 우리도 예배를 연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땅에서 충분히 연습하지 못한 탓에 천국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허둥댈 성도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선수들이 날마다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것은 단지 경기를 더 잘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운동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선수들은 운동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운동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그와 마찬가지다. 예배에 꾸준히 참여할수록, 우리는 예배로 가득한 장차 올 세상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주일마다 공예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예배를 더 ‘잘’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배: 영광의 맛보기
예배는 종말론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배하는 그 시간, 그곳에서 성령의 역사와 믿음을 통해 신자들이 실제로 장차 올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 든 비유를 이어 가자면, 주일에 모이는 것은 큰 경기를 연습하는 것만이 아니라 잠시나마 실제로 그 경기에 참여하는 것과도 같다. 공예배에서 우리는 영광을 준비할 뿐 아니라 그 영광에 참여하기도 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새 언약 아래서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묘사하면서 한 말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여기서도 시온산이 다시 언급된다. 이사야가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예언한 그 산 말이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그 산에서 드리는 예배를 경험하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에 담긴 의미를 밝혀 준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곳에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그분과 함께 거하는 특권을 누린다.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에 오르셨으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곳에 함께 있게 된다(골 3:1–4 참고). 또한 교회로 함께 모여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 특권을 누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듯이, 그리스도는 “자신의 임재와 성령을 통해” 예배의 여러 요소에 복을 주신다(25.3).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하는 일을 그저 ‘교회에 가는 것’ 정도로 여기는 데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우리가 영광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참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것과 성례를 시행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같은 통상적인 방편을 통해 그 영광의 찬란함을 엿볼 수 있다.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게 된다. 즉, 한편으로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수많은 무리와 함께 서 있다.
이 히브리서 말씀에 담긴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특권이자 경험임을 깨닫게 된다. 히브리서 12장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뿐만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쁨으로 모인 “천만 천사”와 함께한다. 어느 누구보다 예배하는 법을 제대로 아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천사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 천사들 곁에서 함께 예배하도록 허락받았다. 영국의 저명한 한 작가가 어느 화려한 행사장의 대기실에 있으면서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는 대기실을 둘러보다가, 다른 참석자들이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나이 든 신사가 그에게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이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작가에게 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바로 닐 암스트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예배하는 자리에서, 우리도 ‘주위를 둘러보다가’,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죄 없는 천사들의 대열에 함께하는 특권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계 7:11,12 참고). 그 사실은 우리의 찬양을 고취해야 마땅하다.
또한 우리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과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도 함께 예배한다. 교회는 “안식을 얻은 이들과 신비롭고도 달콤한 교제를” 나눈다(새뮤얼 스톤의 ‘교회의 참된 터는[The Church’s One Foundation]’ 중에서). 주 안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비극적이게도 바로 지난해, 목회를 하는 내 친구 둘이 끔찍한 사고로 어린 자녀들을 잃었다. 나는 두 친구가 자녀를 잃은 후에도 주일마다 교회에 갈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교회는 가족과 함께하는 공간이므로, 예배할 때마다 누군가의 빈자리가 뼈저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내게 뜻밖의 말을 했다. 물론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친구는 실제로 예배하는 시간을 고대한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바로 그 시간이 되면 다시금 아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예배의 실재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다. 예배에는 우주적 차원과 종말론적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공예배는 하늘에 속한 소망, 멀리 있는 듯한 그 소망을 지금 이곳, 우리의 마음속으로 끌어온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예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른 곳은……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히브리서 저자는 옛 언약 아래서 드리던 예배와 새 언약 아래서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다. 물론 그 모든 차이를 만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존 뉴턴(John Newton)이 ‘사랑하고 찬양하며 놀라워하자(Let Us Love and Sing and Wonder)’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란한 천둥소리를 잠재우시고” “시내산의 불꽃을 끄신” 분이다. 우리의 예배는 더 크신 은혜를 나타내므로 더욱 영광스럽다. 율법 아래서 드리는 예배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 반면 복음 아래서 드리는 예배는 아들을 통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시내산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죄책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반면 시온산은 우리를 아찔하게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그 정상에서 우리는 죽임 당하셨으나 살아 계시며, 우리의 모든 죄책을 없애 주시는 어린양을 바라본다(엡 1:7; 히 10:19; 요일 1:9 참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기에 예배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또한 장차 온전히 알고 누리게 될 영원한 복을 미리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이다. 언젠가 어느 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예배당 지붕을 걷어 내고 하늘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예배하는 동안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에서 졸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덧붙여, 결코 예배에 빠지거나 늦게 오거나 일찍 자리를 뜨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하늘의 실재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을 누리고 싶어 할 것이다. 주일이 다가올 때 이것을 생각하라. 예배를 시작하는 ‘예배로의 부름’은 사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예배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영원한 찬양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하고, 비록 잠시일지라도 장차 올 세상의 경이로움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