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튤립(TULIP)과 개혁신학 : 저항할 수 없는 은혜
2021년 12월 14일
“코람 데오(Coram Deo)”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1년 12월 14일튤립(TULIP)과 개혁신학 : 성도의 견인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서 시작하신 것을 끝내시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개혁신학의 오래된 공리는 다음과 같다: 믿음이 있다면 즉, 참된 믿음을 견지하고 있고 구원하는 은혜의 상태에 있다면, 그것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잃었다면, 너는 결코 그것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 고백을 하고 나서 그것을 외면하고 부인하거나, 그 고백들을 다시 철회한다는 사실을 안다. 사도 요한은 제자들의 무리를 떠난 사람들이 있음을 주목하고, 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요일 2:19). 물론, 그들은 떠나기 전에 겉모습으로는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신앙 고백을 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고백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가능함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심지어 예수님은 산상 설교의 끝 부분에서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와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지 않았나이까?”고 하면, 주님은 그들을 물리치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한 동안은 너를 알았지만 너는 시큰둥해져서 날 배신했다. 아니다. 너는 결코 나의 비가시적 교회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다” 하나님의 선택의 전체 목적은 그분의 백성을 안전하게 하늘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것을 끝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존하시기 위해 성령께서는 거룩케 하시는 자, 확신을 주시는 자, 돕는 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참된 그리스도인도 철저하고 심각한 타락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은혜로부터 전적이며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R. C. 스프로울)
나는 믿음 안에서의 이 인내가 우리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심지어 우리가 중생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심지어 심각한 죄를 범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매우 심각한 타락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배교와 도덕적 일탈 및 기타 등등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 이외에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저지를 수 없는 어떤 죄도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다윗의 모델을 본다.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확실히 중생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령에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심오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간음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인의 남편을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 음모에 가담했다. 그것은 실상 살인 음모였다.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우리는 비록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전한 말씀의 결과로 다윗이 보여준 심각한 수준의 회개를 보기는 하지만, 요점은 이렇다. 다윗은 타락했고, 그것도 심각하게 타락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 능력에 관한 과정된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는 말한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는 심각한 행위들로 타락할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사전 경고를 받은 후에도, 그리스도를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면서 그분을 부인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공적인 배신 행위였다. 그는 자신의 주인에 대한 대역죄를 범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 수 있음을 경고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베드로는 넘어졌지만, 다시 돌아왔고 회복되었다. 그의 타락은 잠깐 동안이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고 심각한 타락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은혜로부터 전적이며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이 작은 구호가 위험천만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교리는 인내가 마치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 스스로 행하는 그 무엇인 듯한 시사를 전달한다. 나는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인내한다고 믿고, 하나님의 의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끝까지 견뎌 낸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사용하는데 열심이어서 견디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믿음 안에서 지속할 수 있는지에 관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도의 보존(preservation)”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우리가 은혜의 상태 속에서 보존되는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존되고 있음에 관한 나의 신뢰는 견뎌낼 수 있는 나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나의 신뢰는 그의 은혜와 중보의 능력으로 나를 지탱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분은 우리를 안전하게 집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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