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TULIP)과 개혁신학 : 제한적 속죄

2021년 12월 14일

튤립(TULIP)과 개혁신학 : 성도의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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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TULIP)과 개혁신학 :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역사적 개혁주의의 사고 속에서 이 교리의 개념은 이렇다: 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 우리는 또한 중생이 하나님의 단독적인(monergistic) 사역임을 믿는다. 지금은 이 용어가 3달러짜리 단어가 되고 말았다. 단독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 부르는 신적인 활동이 하나님 한 분만의 사역임을 의미한다. 단독적(monergistic)이라는 용어의 “에그르”(-erg)라는 어근은 노동의 한 단위, 일의 한 단위이다. 에너지(energy)라는 단어는 바로 그 개념으로부터 온 것이다. 전치사 “모노”(mono)는 “하나”를 의미한다. 따라서 단동설(monergism)은 “하나의 일(사역)”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중생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오직 그분의 능력으로만 행하시는 그 무엇임을 의미한다 – 그분의 능력 50% 인간의 능력 50% 혹은 99% 그분의 능력, 1%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100%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 영혼의 성향과 인간의 마음을 바꾸셔서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이 은혜를 끼치실 때, 그분은 자신이 일으키고자 의도하신 효과를 일으키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당신을 존재케 하셨다. 당신은 그분을 돕지 않았다. 당신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것은 바로 그분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중생, 갱신된 창조의 상태로 이끄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역, 오직 그분 한 분만의 사역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역사하는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기 원하시는 방식 그대로 일으키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정말 죄와 불법으로 죽었다면, 우리의 의지가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우리 육체로부터 자유케 될 필요가 있다면, 마지막 분석에서, 구원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무엇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강력해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본성적 저항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R. C. 스프로울)

그러나, “저항할 수 없음”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불어 일으킨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 대한 끈질긴 저항의 역사이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의 은혜가 저항의 벽에 부딪힐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강력해서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본성적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령이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그리스도를 향해 발길질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 의지의 성향과 기질을 변화시키신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끌어 안으려 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기꺼이 그분을 끌어 안기 원하고, 단순히 원하는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열망한다. 실상 우리가 그리스도께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셨기에 우리가 그분께 달려가 기쁨으로 그분과 함께 포옹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복음의 초대에 무딘 돌 같이 굳은 마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실 때, 그분은 우리 마음의 굳은 것을 녹이신다. 성령은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셔서,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다가서기 원하기에 그분께 나아오도록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심령 안에서 은혜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 없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께 나아올 그 어떤 갈망도 가질 수 없다. 중생이 믿음보다 선행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곤란함을 느끼는데, 이는 내가 이 고전적 교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를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그분이 의도하신 효과를 그대로 가져오기에 “유효적인(effectual) 은혜”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마지막 포스팅에서, 우리는 튤립(TULIP)의 ‘P’, 즉 성도의 견인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결론을 내릴 것이다.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R.C.스프로울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창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Sanford)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초대 설교 및 강도 목사였고,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는 을 포함하여 백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