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2026년 05월 06일
주일의 안식이 증언하는 메시지
2026년 05월 06일차별하지 말라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성경적 예언 이해하기”의 열한 번째 글입니다.
몇 년 전에 한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성경의 매력 중 하나는 ‘영웅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흠과 결점까지 숨김없이 보여 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와 같은 몇몇 인물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런데 이 사실은 교회 공동체에도 적용된다. 특히 사도행전에 묘사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고린도전후서 등 여러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들이 그 공동체의 문제들을 다룬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한다. 반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에 대해서는 좀 더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 시기가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사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던 때였다고 생각하곤 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묘사한 교회의 모습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유익한 교훈을 많이 주지만, 그들의 부정적인 경험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6장 1절을 보자.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이런 갈등의 결과로 교회 안에 집사 직분이 세워진다. 그러나 나는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자 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날마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것은 사도행전 2장 44,45절이 묘사하는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이렇게 참으로 은혜로운 수고를 행하는 과정에 갈등이 빚어졌다. 히브리파 유대인(유대 본토 출신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 헬라파 유대인(본토 밖에서 왔으며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의 과부들을 소외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Reformation Study Bible)은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이 각주를 붙인다. “여기서 오래된 차별 문제가 불거진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토착 유대인에게서 이방인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시작될 무렵,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공동체에는 자신들이 고백하는 교리에 어긋나는 결함이 존재했다. 헬라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 사이에 발생한 이 갈등은 모세 율법에 위배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표지로 가르치신 하나 됨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 분명했다. 집사를 세움으로써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했지만, 신약의 서신서들 전반에 나타난 여러 권면들을 볼 때, 교회 공동체 안에 다른 사람을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차별하는 문제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세상(타락한 인류 전체)의 문화적·사회적 규범을 따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대했다. 이는 타락한 우리 개개인의 상태와도 일맥상통한다.
타락한 우리의 상태가 가져온 수평적 결과는,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보여 주셨듯이, 우리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이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부패한 본성과 우리를 둘러싼 타락한 세상은 이웃의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고, 이웃답지 못한 시각과 처우를 정당화한다.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며 대해야 한다. 이런 원리는 믿지 않는 이웃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세상이 이웃을 타자화하여, 그들에게 이웃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우리는 다른 이들을 편견 없이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나 문화적 조건에서 비롯된 그 어떤 선입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 6장에 나타난 차별은 출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또는 경제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편애하거나 박대하는 문제를 다룬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1–4절).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이런 편파성을 폭로하신다. 양은 필요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을 행했던 반면, 염소는 그것이 곧 주님께 하는 일인 줄 알았더라면 달리 반응했을 것임을 시사한다(44절 참고). 우리는 각 지체가 서로 한데 엮여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의 형편과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나 문화적 조건을 빌미로 우리가 받은 은혜에 반하는 차별을 정당화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21절에서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라고 말한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