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으시는가?

2026년 07월 21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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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를 믿는다. 내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친구들에게는 이 말이 터무니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오직 칼빈주의자만이 ‘튤립(TULIP)’에서 사람들이 꺼리는 ‘L(제한 속죄)’을 붙든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잠재적인 속죄가 아니라 실제적인 속죄로 인정한다면, 보편구원론이라는 거짓을 믿지 않는 한 제한성이라는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로 죄를 속했다는 인식이야말로, 그분의 구원 사역이 얼마나 광대한지를 말하는 놀라운 본문들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은 “그[예수님]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문제는 칼빈주의냐 아르미니우스주의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칼빈주의냐 보편구원론이냐와 관련된 문제이다. 만일 본문의 “세상”이 ‘지금까지 살았거나 앞으로 살아갈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가리킨다면, 화목 제물의 객관적 성격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신앙의 죄까지 포함해,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죄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지옥과 심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결코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세상”이란 앞으로 살아갈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요한은 종종 이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요 14:19; 16:8; 18:20; 요일 2:15 참고). 요한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주어진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밝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인이나 미국인, 또는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속한다.

칼빈주의는 한편으로는 보편구원론이라는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한편으로는 속죄의 객관적 성격을 축소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준다. 칼빈주의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 죽음으로 구원받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속죄를 그 범위와 목적이 제한된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런 오류들을 제대로 막지 못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 속의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구원하도록 의도되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속죄가 그것이 의도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 셈이다. 다시 말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속죄의 범위가 무제한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효력은 제한적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즉, 속죄는 보편적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

이 두 견해는 서로 다르다. 하나는 좁지만 골짜기 끝까지 이어진 다리와 같고, 다른 하나는 더 넓지만 중간에서 끊어진 다리와 같다. 그 다리를 지나 건너편까지 이를 수 없다면, 그것이 아무리 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더욱 제한하는 것은 칼빈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죽으셨다.” 그러고는 구원을 위한 특정 조건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한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느 누구의 구원도 확실하게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당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한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정중히 답한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한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확보하신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구원받았으며,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받지 못할 위험에 처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속죄를 받아들이면 된다. 당신은 그것을 잘 지키라. 그러나 그런 속죄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속죄를 부정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스펄전 설교집, 4권, 228쪽).

그렇다면 스펄전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옹호한 ‘우리의’ 속죄관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자신이 구속하고자 하신 모든 사람을 실제로 구속하셨다고 이해한다. 옛 언약 아래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그의 흉패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 아래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실 때, 그분의 마음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속죄를 이루는 자신의 죽음이 특정한 이들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다. 그분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부르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26–29절을 보면, 그 양들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설명하신다(29절 참고). 또한 예수님은 믿지 않는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신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6절).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역시 동일하게 제한된 범위를 보여 준다. 자기 백성을 위한 희생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특별히 그들을 위해, 참으로 오직 그들만을 위해 기도하신다. 바로 그들은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다(6절 참고). 그러므로 그분의 제사장적 중보는 그들만을 위한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절).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로 자신을 드려 구원하고자 하신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분이 위하여 기도하신 자들은, 그분이 위하여 죽으신 자들과 동일하다.

제한 속죄, 곧 특정 구속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음을 시사하지 않는다. 고난을 받으신 분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도르트 신조는 이 점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무한한 가치와 효력을 지니며, 온 세상의 죄를 충분히 속하고도 남는다”(2.3)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속죄의 제한성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분의 백성, 곧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자들을 위한 특별한 속죄로 계획되었다. 그분의 죽음은 택자들을 구원하도록 의도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구속 사역 전체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38,39절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을 담고 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신학자들은 이 합의를 구속 언약이라고 부른다. 이는 역사 이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타락한 사람들의 구원을 이루기로 맹세하신 언약이다. 성부는 오직 자비와 은혜 가운데, 구원받을 개개인을 선택하셨다(롬 9:11–13; 엡 1:4; 살후 2:13 참고). 성부는 이렇게 선택하신 이들을 성자에게 주셨고(요 6:37,39; 17:6,9,24 참고), 성자는 성육신하여 구속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로 약속하셨다(막 10:45; 요 10:11 참고). 이 신적 계획에 따라,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요 15:26; 16:5–15 참고), 성부가 성자에게 주셨고 성자가 위하여 죽으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신다.

이와 같은 속죄관은 복음 전도의 성공을 보장한다. 하나님께는 복음 전파를 통해 틀림없이 구원받게 하실 자기 백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하신다. 이 진리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낙심했을 때 그를 붙들어 주었으며(행 18:9,10 참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우리 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부단히 힘쓰도록 이끌 것이다(계 5:9 참고).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톰 아스콜

톰 아스콜

톰 아스콜(Tom Ascol) 박사는 플로리다 케이프코럴(Cape Coral)에 있는 그레이스 침례교회(Grace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지역 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는 단체인 파운더스 미니스트리(Founders Ministries)의 상임 이사이다. 그는 『사랑하는 디모데(Dear Timothy)』의 편집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