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2026년 05월 13일
젠더와 정체성
2026년 05월 23일성에 사로잡힌 사회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성윤리”의 두 번째 글입니다.
나는 일곱 살, 열 살, 열한 살 된 손자 셋과 함께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다.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사춘기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곧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생식 능력을 갖춘 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새롭게 찾아오는 혼란스러운 성적 감정과 욕구들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변화를 잘 감당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는 방금 던진 질문에 앞다투어 답을 내놓는다. 광고 시간이 되자, 틱톡 영상 스타일의 광고 하나가 불쑥 화면을 채운다. 그것은 내 손자들처럼 소셜 미디어에 흠뻑 젖어 있는 제트 세대와 알파 세대의 젊은 시청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정교하게 제작된 광고이다. 노출이 심한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차례차례 등장해,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남성 강화 및 성 기능 보조제를 유혹적으로 예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남자에게 그것을 주었더니, 성적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배워 온 단 하나, 곧 개인적인 쾌락이 극대화되었다고 증언한다.
이 광고는 모든 시청자가 성(性)에 관해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리라 전제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성적 존재로 여기리라 전제한다. 이것은 성과 젠더(사회문화적 성)에 관한 모든 것을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교리교육하듯 주입하는 ‘성에 사로잡힌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배운 결과이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전혀 아니다. 1960,70년대 대중문화도 성혁명의 경계 없는 교리들이 낳은 신념과 행동양식을 퍼뜨리고 정당화하면서, 나와 베이비붐 세대의 또래들에게 똑같은 내용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보고 듣는 마케팅, 영화, 텔레비전, 음악, 소셜 미디어는 성에 사로잡힌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대중음악을 예로 들면, 장르에 따라 노래의 40-60퍼센트가 성적인 가사를 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렇게 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문화적 서사에 익숙해지다 보니, 한때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법한 것에도 무감각해져, 이제는 성적인 내용인지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사실 우리는 그 서사를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손주들, 외부의 영향을 받기 쉬운 이 아이들의 눈으로 광고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성에 관한 이런 문화적 서사와 그 만연함을 직시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 계속해서 성에 관한 진리를 올바로 알고 실천하고 말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 유혹적인 거짓말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성과 성적 정체성, 젠더라는 선물에 담긴 그분의 선한 설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의 문화적 서사가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미묘하게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인류가 성과 젠더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포함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마땅한 모습 그대로 존재했으며, 하나님은 그것들을 보고 “좋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2장 참고). 그런데 이 세상의 파괴자가 우리 첫 조상에게 다가와 그들의 귀에 유혹적인 거짓말을 속삭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설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주권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부추긴 것이다(창 3장 참고). 이런 반역과 죄의 결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선물인 성과 성적 정체성, 젠더를 아는 인류의 지식도,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영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성혁명의 씨앗은 우리 삶의 토양 깊숙이 뿌리내릴 정도로 자라났고, 그 열매는 너무나 익숙한 맛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세상이 시키는 대로 믿고 행동해도 되는지조차 묻지 않게 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보았던 뉴스 보도를 기억한다. 현장 기자가 어느 식당의 테이블을 하나씩 돌면서 사람들에게 대통령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가 문화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바람을 피웠어요.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요? 남자들이란 원래 다 그렇잖아요.”
오늘날 성과 젠더에 관한 우리의 행동은 2005년 MTV가 진행한 성교육 캠페인 ‘Think’에 반영된 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 캠페인은 아이들에게 “근본적으로 그것은 네 몸이며, 그 몸으로 무엇을 할지는 네가 결정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늘날 미디어, 음악, 학교의 포괄적 성교육, 또래 집단의 영향력을 통해 퍼지고 있는 ‘성 긍정(sex positive)’ 운동은, 수많은 형태의 성적 표현이 인간의 삶에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모습인 양 이를 권장한다. 최근 구글에서 ‘성 긍정’ 운동을 검색해 보니, AI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았다. “성 긍정이란 인간의 성을 바라보는 태도로서, 합의된 모든 성적 활동을 근본적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것으로 여기며, 성적 쾌락과 실험을 장려한다. 이 운동은 사회적 금기를 문제 삼고, 합의된 건강한 성적 활동을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이 운동이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자녀와 청소년들에게 성경적 성 윤리가 실상 성에 부정적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설계가 성적 표현과 젠더 표현이라는 문제에 경계와 한계를 둠으로써 건강한 성을 억누른다고 믿는다. 우리의 성 중심적인 문화는 자신들의 행태를 적극적으로 부추길 뿐 아니라 온갖 죄를 찬양함으로써, 전통적인 성경적 성 이해와 젠더 개념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깎아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문화가 퍼트리는 거대한 거짓말들
이런 성적 서사에 맞서는 일은 벅찬 과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설계하신 성에 관한 진리를 말하려면, ‘성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와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믿게 만든 여러 힘이 어떻게 맞물려 완벽한 폭풍을 일으켰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혼란의 뿌리를 키운 거대한 거짓말들을 알면, 우리가 숨 쉬는 문화적 공기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 거짓말들을 분별하고 지적하고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거대한 거짓말들이란 무엇인가? 많은 거짓말이 있겠지만, 여기 문화라는 태피스트리 속에 한데 얽혀 우리의 성과 젠더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더 정확히 말해 왜곡하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이 거짓말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거짓말 1. 당신의 주인은 당신 자신이다. 이 거짓말은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당신에게서 최고의 충성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그 어떤 권위도 당신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권한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도, 상사도, 교사도, 정부도, 심지어 하나님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거짓말 중에서도 첫 번째요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바로 이 자기 숭배와 자기 주권을 받아들이라고 유혹했다(창 3:1–5 참고). 하나님의 원수가 처음 내뱉은 단 몇 마디 말, 곧 “하나님이 참으로……하시더냐?”라는 질문은 우리의 첫 조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했다. 하나님께 범죄하기로 한 이 선택의 결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부패했으며, 그 즉시 성과 젠더를 포함한 모든 선한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탄은 계속 이 거짓말을 퍼뜨리면서, 성과 젠더에 관해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리의 계획을 선택하라고 부추긴다. 또한 끊임없이 우리 귀에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라고 속삭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부채질한다. 성혁명의 영향 아래 성장한 데보라 새비지(Deborah Savage)는 『퍼스트 싱스』(First Things)에 기고한 글 ‘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에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일깨운다. “인간의 성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그러하기에 뱀은 그 영역에 간섭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는다.”
거짓말 2. 당신의 마음을 따르라. 이 거짓말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과 권위가 있으며, 따라서 오직 내면의 감정을 우리가 따라야 할 권위 있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은 매순간 변할 수 있고, 실제로 변하므로, 우리의 기준도 그렇게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성과 관련해 이 거짓말의 가장 큰 위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적 욕구를 두셨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욕구가 타락했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본래 설계하신 바를 따를 때에만 선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성경적 성 윤리의 울타리와 경계 안에서 이 욕구들을 누리게 하는 선한 자기 절제가 없으면, 우리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마음이 시키는 대로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는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죄를 죄로 믿는 것만이 유일한 죄가 되는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지난 60년 동안 대중음악에서 “기분 좋게 느끼는 대로 하라”라는 문구보다 더 자주 울려 퍼진 메시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개인의 쾌락과 성취를 성혁명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결과로 내세운다.
진 에드워드 베이스(Gene Edward Veith)는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운다. “사탄은 우리의 욕구에 호소함으로써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약속함으로써 우리를 꾀어낸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그 욕구를 충족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결국 사탄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신의 반역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여기에는 성과 젠더에 관한 하나님의 설계에 반하는 선택도 포함된다.
거짓말 3. 당신의 진정한 자아에 충실해야 한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상상’에 주목했다. 사회적 상상이란 ‘세상이 어떠해야 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집단적 이해’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사회적 상상은 우리에게 표현적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라고 부추긴다. 표현적 개인주의는 모든 사람의 자기표현 욕구가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믿게 만드는 사고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일단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이제 참된 자아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는다면, 성적 자기표현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만약 자신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다고 느껴진다면, 주저하지 말고 자신의 느낌에 맞게 몸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참된’ 자아를 표현하라고 부추긴다. 그에 따르면, 정체성은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성을 추구하는 문화는 저마다 자신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고유한 길이 있다고 믿는다. 또한 사회나 이전 세대, 종교적 권위나 정치적 권위처럼 외부에서 강요하는 틀에 순응하기보다, 자기 본연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태도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사회적 상상이라 부르지 않고, “이 세상 풍조”(엡 2:2)라고 부른다.
서사 바로잡기
오늘날의 문화적 서사는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메시지를 퍼부으면서, 성과 젠더 문제에 관해 우리의 자녀와 청소년들은 물론 우리 자신, 심지어 미취학 아동까지도 길들이고 유혹한다. 이런 교육, 더 정확히 말해 이 잘못된 교육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인 성과 젠더를 왜곡해, 우리 자녀와 청소년을 위한 하나님의 크고도 영광스러운 계획을 허물어뜨린다. 현실을 보면, 아이에게 성과 젠더에 관해 가장 먼저 말해 주는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을 세우게 되고, 결국 아이는 이후에 듣는 모든 것을 처음 들은 내용에 비추어 판단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말하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이것은 ‘한 번 치르고 지나가는 성에 관한 대화’가 아니라, ‘계속 이어 가야 할 대화’이다. 가정과 교회는 성과 젠더에 관한 문화적 서사에 맞서 성경에 기초한 바른 가르침을 신실하게 제시해야 하며, 그것을 거듭 반복해야 한다. 성경적으로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전해야 할 세 가지 핵심 요소는 다음과 같다.
성과 젠더에 관한 권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길과 뜻을 따르도록 부름받았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규범으로 계시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권위이다. 세상의 문화는 자기 자신의 권위 외에 어떤 권위도 위에 두지 말라고 가르친다. “너답게 살라”, “네 마음을 따르라”라는 문화적 구호는 우리에게 개인적 욕망과 감정과 직관의 권위 아래 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 신뢰할 수 없는 직관을 부인하고, 대신 사랑 많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렘 17:9 참고). 진리를 이해하는 일을 감정이 지배하고 왜곡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만물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뜻과 방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의 믿음과 행실은 성경적 진리에 굳게 뿌리내려야 한다(딤후 3:10–17 참고). 감정으로 성경을 판단하지 말고, 성경으로 감정을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성과 젠더를 설계하고 질서를 세우셨다. 인간의 성과 결혼, 젠더에 관한 하나님의 질서와 설계는 창조 기사에 분명히 나타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도 확인되며,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선포된다. 창세기는 성과 결혼과 젠더에 관한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보여 주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일관되게 확증하시며(마 19:4–6 참고), 성경의 나머지 모든 부분도 이를 증언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질서와 설계를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본으로 삼아야 한다.
젠더와 성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방식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창조 기사 가운데 인류를 위한 크고도 영광스러운 계획을 계시하셨다. 인간이 된다는 것, 곧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태초’에서 그 계획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계획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고 “좋다”라고 인치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하나님은 “심히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보고 “심히 좋다”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오직 남자와 여자라는 젠더 이분법만을 설계하고 정하셨으며, 둘 다 온전한 인간이요 동등한 존엄을 지닌다. 우리의 첫 조상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세계를 돌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도록, 서로를 보완하는 생물학적 형태와 목적을 부여받았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구별 짓는 성 기관을 주셨으며, 심지어 우리의 DNA 속 유전자까지도 그것을 알려 준다. 이것이 만물에게 마땅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4절에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확증하신다. 하나님의 설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인간 됨을 훼손하고, 인류의 번영을 저해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혼을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적이고도 평생 지속되는 연합, 곧 이성이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일처의 결합으로 제정하셨음을 배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성이라는 선하고도 아름다운 선물을 주시고, 그것을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나누고 경험하게 하셨다. 결혼은 성을 누리는 자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의 목적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 관계를 완성하고 인치며, 서로의 친밀함과 사랑을 표현하고 증진시키며, 서로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하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는 모형을 제공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위안(Christopher Yuan)이 일깨우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性)”으로 부르시는데, 그것은 “두 길, 곧 독신일 때 절제하는 것과 결혼 안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그분의 뜻과 방식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
부모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서사와 그 파급력을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도록 돕기 위해, 시편 기자가 시편 11편 3절에서 던지는 질문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에 대해 성경은 곧바로 자기 주권에 사로잡힌 문화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4절). 그렇다. 하나님은 실재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시편 기자가 71편에서 결단한 바와 같이, 우리는 자녀와 손주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7,18).
이것은 우리 자녀와 청소년들, 심지어 우리에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리교육을 하듯 성적 서사를 주입하면서 인간 됨과 관계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흐름을 바로잡기 위해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지침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