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교회를 돕는 일
2026년 06월 27일위험에 처한 두 단어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진정한 기독교”의 열 번째 글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이웃들에게 다가가려 할 때,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까다로운 장애물을 맞닥뜨린다. 그 장애물은 바로 ‘진리’와 ‘믿음’이라는 표현이다.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기독교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우리의 과업 자체를 두고 경계의 말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과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여기서 내가 다루려는 핵심 내용은 그것이 아니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촉구하는 우리의 사명을 두고 주의를 당부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 일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가 염려하는 바를 전하고자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친구나 가족과 대화하면서 ‘진리’와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면, 확신하건대 그들은 흔히 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곤 한다. 불신자들에게 그 단어들은 우리가 아는 바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간다. 결국 그들은 우리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전달하려는 의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진리’를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이 단어는 ‘사실’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여겨졌다. 과학에서든 역사에서든 윤리에서든 종교에서든, 어떤 진술을 진리로 인정한다는 말은 곧 그것이 사실임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세상의 실상을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는 뜻이었다. 단순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최근 들어, 이 짧은 단어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복음의 진리”(갈 2:5)를 언급했고,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확실한 사실”(눅 1:4 참고)을 알게 하려고 글을 쓴다고 말했다. 즉, 그들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은 진리라는 단어를 그런 의미로 사용한다. 다만 종교나 도덕에 관해 말할 때는 예외이다. 그럴 때에는 ‘진리’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바뀐다.
‘너의 진리’나 ‘나의 진리’, ‘그들의 진리’처럼 ‘진리’ 앞에 소유격 대명사가 붙는 경우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 단순한 변화만으로도 그 단어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사람들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는 어느 누구도 객관적 진리를 참으로 알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사실’의 동의어가 아니라 ‘신념’의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사실은 사실이다. 반면 신념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념’을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이상한 일이다. 어떤 신념이 사실과 맞지 않다면, 그것은 부정확하거나 잘못되었거나 빗나갔거나 그저 틀린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진리일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혼동은 계속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움직임이 호의적인 관용을 낳는다는 점에서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영적 신념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동일하게 진리로 여겨지므로, 종교적 차이를 두고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나름의 영적 환상을 품을 자유를 동등하게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 문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성경적 견해가 다른 이들의 견해보다 더 건전하거나 참되거나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이들이 그 흐름을 따라갔다.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첫째, ‘믿음’이나 ‘신념’처럼 쉽게 상대화되어 ‘당신의 진리’로 오해될 수 있는 말 대신, 당신의 확신, 곧 당신이 무엇을 확신하는지를 말하라. 둘째, 당신이 말하는 것이 종교적 바람이나, 그저 기분을 좋게 하려고 지어 낸 이야기가 아님을 끊임없이 분명히 알려 주라.
우리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이 동화나 신화로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당신이 공상적인 허구가 아니라 검증할 수 있는 역사를 전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라.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가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당신이 어떤 내용을 주장하는지는 알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참되다는 점을 그에게 알려 주라. 곧 그것은 중력이 참되다고 말할 때 거기에 담긴 것과 같은 뜻을 가진 진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아니라면, 기독교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이와 같이 종교적 진리는 상대화되고,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신념으로 축소된다. 이런 식으로 급격하게 의미가 변화된, 또 하나의 까다로운 단어가 바로 ‘믿음’이다. 100년 전만 해도, 어느 누구도 종교적 믿음을 맹목적이고도 비이성적인 비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이성과 믿음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무신론자는 믿음을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것’, 심지어 ‘반대되는 증거가 충분한데도 신념을 고집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안타깝게도 일부 그리스도인이 이런 혼란을 부추겨 왔다. 그들은 “증거가 그렇게 많다면, 믿음이 왜 필요하겠는가?”라고 빈정거린다. 이 미묘한 계산법에 주목하라. 증거가 많을수록 믿음은 작아진다. 그리고 증거가 적을수록 믿음은 커진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 변증, 곧 믿음을 변호하기 위해 증거를 제시하거나 근거를 드는 것은 사실상 믿음에 해가 된다.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다.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티스(pistis)’는 ‘능동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성경에는 믿음의 비약이 아니라, 합당한 근거를 토대로 확신하는 가운데 신뢰의 발걸음을 내딛으라는 호소가 충만하다. 곧 신뢰할 만한 증언(행 2:32 참고), 이성적 숙고(행 17:24–29 참고), “확실한 많은 증거”(행 1:3)를 근거로 삼으라고 말한다. 이런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까다로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짚어 주면서 그들이 올바로 깨닫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완고한 회의론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왜곡된 정의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그들이 믿음을 증거 없이 믿는 것이라고 우기면, 그저 이렇게 대답하라. “그렇다면 내게는 ‘믿음’이 없는 셈이군요. 나의 신뢰는 확실한 근거가 있거든요. 나는 충분한 근거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 그것은 단지 번역된 표현일 뿐이다. 우리말로 옮긴 단어가 성경의 헬라어 원어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대체할 만한 표현으로 조정하는 것이 지혜롭다. 세상에서 열매 맺는 증인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이 흔히 하는 식으로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문화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진리’와 ‘믿음’이라는 말이 매우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다. 그런 혼란은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달하는 데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
이런 혼란을 이해하고 바로잡으면, 당신이 뿌리는 복음의 씨를 마귀에게 빼앗길 우려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오히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어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마 13:23)로 열매 맺을 것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