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증거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마태의 증거
2023년 01월 18일
누가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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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증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복음서”의 세 번째 글입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 구절의 97%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복음만 읽어도 되는데 왜 마가복음이 있는 걸까? 두 가지 상충하는 이론이 있다. 즉 마가복음은 규모가 더 큰 마태복음의 요약본으로 기록되었거나, 아니면 마태복음이 후에 마가복음의 확장본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복음서의 가능성 있는 기원과 관계없이, 마가복음을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하는 것과는 별도로 마가복음이 신약성경 정경에서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고, 죽음 후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왕으로 일으킴을 받기로 결심하시고,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수난을 향해 담대히 걸어가시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화려하고 생생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이 책의 몇 가지 상세한 사항을 살펴보자.

마가복음은 갑자기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시작은, 말달리기 시합의 시작 부분처럼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어떤 설명도 없다. 첫 번째 구절은 제목처럼 읽힌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런 다음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주요 선지자(마가복음 1:2~3)로 요한을 인용한 후 단지 요한의 삶과 사역에 관해 요약만 해줄 뿐이다(1:4~8). 예수님이 등장하고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숨을 돌릴 시간이 없다.

마가복음의 내러티브 속도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말씀에 거의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마태복음의 긴 산상수훈(마 5~7장; 또한 눅 6장, 12~13장 참조)과는  대조적으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두 개의 짧은 부분(막 4장과 13장)과 전체에 퍼져 있는 일부 작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마가는 주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시험을 비교해 보자. 다른 공관 복음서(마 4:1~11; 눅 4:1~13)의 더 완전한 설명에 비해 마가복음은 단지 두 구절(마가복음 1:12~13)만 가지고 있다. 다른 성경에서 예수님은 광야로 “인도”되고 시험 자체가 기록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로 내몰리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부분만 나오고 시험의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다. 마가는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과 그분이 세례 받으심이 이제 우리가 빈들에서 평안히 거할 수 있도록(겔 34:25; 계 12:14~16)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광야와 들짐승의 저주를 어떻게 겪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참조 막 10:39; 레 26:22; 렘 12:9; 50:39; 겔 14:21).

마가복음 문체의 신속성은 여러 면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헬라 작가들이 선호하는 우회적인 문체 대신 짧은 능동형의 문장을 사용한다. 마가는 또한 생생하고 직접적인 인용을 선호하며 “저물어 해 질 때에…”(막 1:32) 또는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2:25)와 같은 특이한 중복을 사용한다. 마가복음의 더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리고 즉시(and immediately)라는 것인데, 마가가 새로운 사건을 소개할 때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다. 이런 표현이 약 40회 사용되었으며, 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된 것을 합친 것보다 거의 두 배나 자주 사용되었다.

마가복음을 한 구절씩 읽을 때, 마가의 중복되고 생동감 있는 문체의 독특한 특징의 완전한 효과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관찰을 하게 한다. 고대에는 대부분의 책을 큰 소리로 읽어서 듣는 것을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썼다(특히 계 1:3 참조). 그 당시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흔하지 않았다. 또한 심지어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 낭독자가 작품을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낭독자가 감정, 몸짓, 심지어 읽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어 읽어주는 작품을 경험하고 싶어했다. 공공장소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관객이 이야기에 끼어들어 악인을 야유하고 선한 사람에게 손뼉을 치고 환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가복음의 구술적 특징들(oral features)에 관한 연구에 가장 많은 성과가 있었다. 이런 연구의 한 가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마가복음을 요즘 우리가 읽듯이 읽으면, “그리고 즉시”와 같이 반복되는 문구가 다소 끊겨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청자를 새로운 줄거리 전개로 향하게 하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비유에 탁월한 것처럼, 마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이것을 직접 경험하려면 큰 소리로 읽어주는 마가복음을 들어봐야 한다. 마가복음 전체를 듣는 데 약 90분밖에 걸리지 않으며 이런 경험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

마가복음을 들을 때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장으로 구분된 이야기 사이의 상호 연결성이다. 마가복음의 주요 개요를 보여줄 몇 가지 중심 이야기를 살펴보자.

마가복음 6:30~44에서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고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의아해했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빠르게 마가복음 8장 1~10절로 이동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천 명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먹이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열두 사도는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라고 대답한다. 듣는 자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잠시 기다려. 그들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예수님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마가는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두 번째 무리를 먹이신 후에 마가복음이 더 전개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물질적인 빵 한 덩이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리를 두 번 먹이셨던 것을 상기시킨다(막 8:14~21). 마가복음 이야기의 이 시점에서, 듣는 자로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절망하기 시작하지만, 마가복음 8:27~30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물으신다. 머리가 둔한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는 마침내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한다(8:29; 마 16:16과 눅 9:20 비교).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마가복음의 위대한 중심이자 핵심이다. 그리고 마가는 능숙하게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실을 볼 수 있도록 이끈다. 마가복음 전반부에서 예수님의 능력있는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서 통치할 그리스도(또는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가르침의 핵심 요지였다. 즉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지만 마가복음 1:1절을 제외하고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재촉해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하는 복음의 핵심이 되기까지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 제자들은 깨닫는다! 무리를 먹이신 것은 우리와 제자들이 마침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도록 이끌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첫 번째 부분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데 달려 있다. 하지만 마귀를 제외하고!(막 1:24, 34; 3:11) 모든 사람이 그분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마가는 그들의 두려움, 경악, 깜짝 놀람, 당혹감, 심지어 어리둥절함에 해당하는 8개의 다른 헬라어 단어를 통해 스물아홉 곳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아니한 이 예수는 누구인가(1:22)? 바리새인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고 생각한다(3:22~30). 헤롯은 그가 다시 살아난 요한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나 위대한 선지자라고 생각한다(6:14~16; 신 18:15 참조).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고(막 3:20~21),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도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4:41).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반응은 예수님의 참된 왕의 권위를 강조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9~11) 요한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1:7~8) 예수님은 강력한 말씀과 행위에서 두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2:1-12), 마귀의 군대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고(5:1~20; 더 짧은 마 8:28~34 및 눅 8:26~39와 비교), 궁극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분의 권위에 대해 예루살렘의 당국자들과 갈등에 직면하기 때문이다(막 11:27~33). 하지만 예수님의 통치는 그가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점에서 이방인 통치자의 통치와는 완전히 다르다(막 10:42~45; 사40~66장 참조).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 즉 예수님은 주권자이며 신인(神人)인 메시아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전반부에서 자신에 대한 이런 믿음의 고백을 위해 사역해 오셨다. 그 결과로 마가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참된 구속적 사명을 제자들에게 계시하기 시작하셨다. 특히 요한복음과 대조되는 마가복음의 이러한 전환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강조된다. 즉 마가복음 전반부의 이런 행동이 거의 전적으로 갈릴리에서 일어나지만,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기 얼굴을, 자기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로 이스라엘 지도자의 손에 고난당해야 하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예를 들어, 막 8:31; 9:12; 10:45).

결론적으로, 마가는 듣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장엄한 권위에 관해, 특별히 그분 당시의 사람들을 초자연적인 성품으로 놀라게 했던 강력한 행동으로 역동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분의 도래와 함께 참으로 가까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시작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막 14:62) 왕의 부활과 승천 이전에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대속적 희생이었다. 마가는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이 첫 번째 제자들과 함께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전했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S.M. 바우
S.M. 바우
S.M. 바우 박사(Baugh)는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에 있는 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의 신약학 명예교수이자 정통 장로 교회(OPC)의 목사이다. 그는 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