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유혹, 시험의 시간을 지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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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유혹, 시험의 시간을 지날 때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시련, 유혹, 그리고 믿음의 시험”의 열 한 번째 글입니다.

우리 큰아들이 태어난 다음 날 아침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가 집에서 무사히 출산을 마친 후, 조산사는 우리가 쉴 수 있도록 짐을 싸서 귀가했다. 그날 밤 우리 모두 평온한 밤을 보냈고, 남편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일찍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주려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지난 9개월 동안 첫 출산 계획을 세우면서도  물티슈 한 통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신생아를 맞이할 때나, 저녁 5시 반에 맞춰 저녁 식사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준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예외는 아니다. 천국의 이쪽 편에 살아갈 때 온갖 모양의 크고 작은 고난과 시험과 유혹은 불가피하다. 망가진 식기세척기, 치매, 매일 지고 가야 하는 자신의 남은 죄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경건이 조금이라도 성장하거나 하나님을 누리는 것을 방해하려고 맹렬히 노력하는 원수가 우리 곁에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은 충격적이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서신은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진 편지이다. 그들은 믿음을 가혹하게 흔들어대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있었다(벧전 1:6). 고난은 외부의 박해 이외의 상황까지도 수반한다. 그들은 박해에 대응해야 하고,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가 분명히 그들을 거룩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가 시련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시련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독자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상기시키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거룩해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베드로는 독자들을 시련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으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시련의 시간을 준비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리스도인의 준비는 상황을 통제하려거나, 고통이나 좌절을 초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련과 시험을 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시련과 시험이 닥칠 때 악하고 근시안적인 방식이 아니라, 건전하고 안정된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준비는 상황이 힘들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이 더욱 거룩해지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독자에게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3, 15)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근신한 마음으로 고난”당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는 분명하고 성경적인 사고로 시작하여 거룩한 행실로 끝내기 위한 준비이다. 반쪽 진리와 충동적인 감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시련이 우리에게 종종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리는 바른 사고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지만, 고통스럽고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 패턴은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준비된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인 경각심과 근신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사고 대신 진리에 따라 상황을 평가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진리의 말씀에 잠겨 진실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은 찬양과 확신과 위로의 안전한 장소가 된다.

근신한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향한 이 고난의 여정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단순하지만 직접적인 은혜의 수단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수단을 매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영원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시련과 유혹이 닥쳤을 때 이를 직면할 준비를 갖추도록 해준다.

개인 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은 신자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익숙한 유혹에 직면할 때나 예상치 못했던 시련에 넘어질 때도 말씀은 우리를 캄캄한 바닷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안전한 육지로 인도하는 등대의 빛이 된다.

시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길”에 있을 때도 우리에게는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내가 열다섯 살에 신경 질환으로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화살을 쏘시는 모습을 마음속에 품기 시작했다. 나에게 그분은 빼앗는 자였기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 가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과 감정적으로 격앙된 관계를 만들어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이해가 정확했다.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무언가를 빼앗아 가셨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을 아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 시련을 온전하게 벗어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다른 진리들은 무엇인가? 나를 향하신 그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지금 사탄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를 치료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우리에게는 죄가 남아있기에, 이 땅에서는 고통을 예상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바르게 설명하는 저서들에 푹 잠기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또한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성경에서 “준비된 마음”을 잘 보여주는 예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였다.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유혹하는 그 순간에 진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진리를 아셨다. 마음에 기록되어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시험이 닥칠 때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종종 이 “피할 길”을 어떤 외부의 힘이 우리를 유혹에서 빼내어 주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대부분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피할 길은 이런 특별한 구출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가 굳게 서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이다.

성경적 진리로 생각의 훈련을 받고, 이를 활용할 때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께 마음을 쏟아부을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삶의 불길에 휩싸였을 때 큰 위로를 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감정으로 가득 찬 기도는 굳건하게 서도록 돕는 대신 넘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표현한 순수한 정직함 때문에 사랑받고 있다. 다윗은 가짜 미소를 지으며 금욕주의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다윗의 기도는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솔직한 외침 그 이상이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방식에 관한 냉철하고 정직한 진리의 선포였다. 감정이 아닌 진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진리의 말씀에 잠겨 진실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은 비성경적인 기대와 경솔한 말로 걸려 넘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찬양과 확신과 위로의 안전한 장소가 된다.

공적 예배

나는 매 주일 교회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청각 장애가 있기 때문에 설교를 휴대폰에서 캡션으로 읽어야 하고, 찬양 소리도 잘 들리지 않으며, 교제는 잘해도 피곤하고, 잘못하면 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의 아내가 되도록 택하셨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교회에 간다. 지난 20년 동안 신경 질환으로 시련을 겪으며 받은 큰 유혹들 중 하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에서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저들은 나를 이해 못 해. 너무 어색해. 어차피 참여도 못하는데 뭘.’ 그러나 이렇게 격리시키는 것이 더 편했을지는 모르지만, 더 유익했던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하는 공동 예배라는 선물을 주셔서, 우리가 꾸준히 성장하도록 격려하는 데 귀중한 수단이 되게 하셨다.

성경에 충실한 교회에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을 때, 예배의 다양한 요소, 특히 설교를 통해 근신한 마음을 준비할 기회를 매주 갖게 된다. 주일 예배에 헌신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모든 것의 중심에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내 자신의 문제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내 생각의 방향을 바꾸려면 그 진리가 필요하다.

교회 장의자에 슬그머니 앉아 축도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과, 교회 카페에 가서 교제를 위해 사람들을 찾는 것은 다른 일이다. 교제는 사람을 포함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복잡하다. 우리는 서로 오해하기도 하고, 봉사하느라 바빠서 필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날씨에 관해 장황하게 떠든다. 조금 전 삼위일체에 관한 설교를 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강화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공동 예배의 이런 부분조차도 사용하신다. 예배에 오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낙담과 절망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일 아침이 되면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가 인내심을 가지고 듣고 주의 깊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모든 대화와 함께 하는 활동을 통해서도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주세요.”

인내의 여정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과 성화의 좁은 길이다. 근신한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돕는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왜 그토록 그 길에 머물려고 노력하는지 궁금해한다. 우리도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험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길을 갈 때가 있다. 지속되는 고통과 여전히 불편한 관계들로 인해 죄를 정복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다. 그런데도 왜 계속 이 길을 가야 하는가?

아마도 베드로 전, 후서의 독자들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고, 베드로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근신한 마음의 고난은 장차 올 일에 대한 냉철한 희망을 가지고 견디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에서 보게 되는 패턴이다. 저자들은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문제들에서 시선을 돌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새 창조, 신자의 영화를 보도록 한다. 모든 명령과 복음의 모든 격려, 모든 책망과 확언, 하나님의 성품과 방식에 대한 모든 설명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의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천국의 영원한 삶이다. 이것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전망이다. 지금은 믿음으로 믿는 복음을 그날에는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며, 못 자국 난 그리스도의 손 앞에 머리를 숙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거룩함은 완전해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함을 바라보며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요일 3:2)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테사 톰슨
테사 톰슨
테사 톰슨(Tessa Thompson)은 Laughing at the Days to Come: Facing Present Trials and Future Uncertainties with Gospel Hope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