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나가 받은 시험
2024년 05월 22일
베드로가 받은 시험
2024년 05월 30일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시험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시련, 유혹, 그리고 믿음의 시험”의 여덟 번째 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큰 실패 중 하나는 아마도 타협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일 것이다. “퀴어” 정체성을 포용하고, “게이” 목회자에게 안수하고, 동성 커플(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을 축복해야 하는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기독교 형제자매들은 현대 서구의 목회자와 교회, 교단이 어떻게 이교도 문화에 순응하고 성적 및 성 정체성의 우상에 무릎을 꿇고 있는지에 대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군목에게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목사가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책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주장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나는 한 손에는 그 책을,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성령께서 내 눈에서 눈가리개를 벗겨 주셨고, 그 목사와 그 책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분명히 왜곡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셨다.
기원전 6세기경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이교도 우상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헌신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는”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33-34절).
다니엘서 6장에서 다리오 왕은 자신에게만 청원할 수 있고 다른 신에게는 청원할 수 없다는 칙령에 서명했다. 다니엘은 왕에게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왕에게 순종하느냐 하는 시험에 직면했다. 다니엘이 해야 할 일은 30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뿐이었고,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왕이 있는 곳에서” 왕을 만나고 “청원 수락”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동화되는 것이 다니엘에게 탈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슬픔에서 영광으로.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자들의 줄거리이다.
다니엘서 3장에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도 알려짐)는 금 신상에게 절함으로써 하나님을 버려야 하는 시험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우상을 숭배할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 세 사람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던 느부갓네살에게 흔들림 없이 맞섰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능히 건져내시겠고”(17절)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결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왕의 요구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것은, 왕에게 불순종한 것에 대한 어떤 형벌, 심지어 사자나 풀무불과 같은 형벌도, 만왕의 왕에 대한 불순종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풀무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워지자 느부갓네살은 그의 용사 중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겉옷을 입힌 채 결박하라고 명령했다(20-21절). 풀무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히브리 청년들을 결박하던 용사들이 불길에 휩싸여 죽었고, 세 친구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다(23절). 놀란 느부갓네살이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라고 외쳤다(24절).
“결박하다”가 네 번 반복되는 것을 주목하라. 반복은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와 같아서 핵심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두 번 반복되는 것은 우연일 수 있다. 세 번 반복한 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다. 하지만 네 번째 반복은 강렬하고 도발적이다.
어째서 그럴까? 느부갓네살의 입에서 해명이 나온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25절) “결박되지 아니한”으로 번역된 아람어 셰라얀(sherayin)은 “해방된” 또는 “자유롭게 된”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길은 세 사람의 몸이나 머리카락, 망토에 닿지 않았다. 심지어 연기 냄새도 나지 않았다(27절). 하나님께서 불에 타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들을 묶은 바로 그 밧줄뿐이었다.
사랑스럽고 주권적인 하나님은 왜 순종에 대한 결과로 불같은 시련을 허락하셨을까? 다윗이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묻고 있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1절).
시편 22편에 나오는 다윗의 말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지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의 고난을 대변하기도 한다.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시 22:14)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21절)
그러나 결국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찬송했고(단 3:28), 다리오는 백성들에게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라는 조서를 내렸다(6:26).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시 22:27) 불같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보여준 신실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슬픔에서 영광으로.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의 이야기이다. 전위적(avant-garde)이고 다국적인 우상 숭배의 전형을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 없이 불길과 사자의 턱에 맞서겠는가? 우리는 후자를 선택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할”(히 11:38) 허다한 증인의 환영을 받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