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연한 등장
2024년 07월 26일
용서받을 수 없는 죄
2024년 08월 01일성찬식에 나타난 연합으로의 부르심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열두 번째 글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에게 성만찬은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매우 깊고 개인적인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다. 당연히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만찬이 개인적인 일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고 강화해야 하는 식사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7-3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혹한 책망을 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아마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교인들에 대한 적절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당시 주의 만찬은 아마도 현대의 포트럭(potluck)처럼 음식을 가져와서 나누는 식사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음식을 먼저 먹기 시작했고, 일부는 술에 취하기도 했다. 노예였을지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늦게까지 일하고,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은 음식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20-22절에서 읽은 것처럼, 동료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소홀함은 성찬을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게 만들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9절의 “몸”에 대한 바울의 엄중한 경고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인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에 대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 머리이신 주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억하면서 온 교회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빵 없이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관리하고 있으며, 포도주(또는 주스)의 양이 너무 적어서 아무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몸의 연합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예를 따라, 같은 사회⋅경제적 계층, 같은 나이, 같은 피부색, 같은 정치 이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신체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담을 쌓는 것은 너무 쉽다. 신학적으로 미세하게 다른 부분으로 인해 동료 교인들과 갈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분은 자신을 내어주는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모두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은 죄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같은 교회에 생활하는 것 이상의 영적 일치를 보여주기 위해 진정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처음 받았던 사랑으로 망설임 없이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참된 기독교적 사랑의 자세로 주의 만찬에 임하고,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보여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주의 만찬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모임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연합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