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24년 06월 29일성경
2024년 07월 06일하나님과 인간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J. 그레샴 메이첸은 근대적 사고에서 하나님과 죄의식에 대한 개념이 상실된 것을 한탄했다. 메이첸에 따르면, 현대 자유주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에 대한 개념과 지식의 필요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신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종교를 매장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을 생각하고 싶다면 모호하고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만 이는 모든 피조물의 전우주적인 아버지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인 형제애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메이첸은 성경이 전우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행 17:28; 히 12:9).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할 때는 그분의 구속된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몇몇 고립된 구절만 이를 뒷받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첸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기독교에서 하나님 교리의 중심이나 핵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머지 속성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한 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경이로운 초월성”이다. 메이첸은 하나님의 놀라운 거룩하심, 즉 하나님의 구별성과 차별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것이 근대 자유주의가 망각한 진실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자유주의는 참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차이를 좁히고, 단지 “세상의 과정”의 일부일 뿐인 범신론적인 신을 만들어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며, 그분의 삶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이렇게 말한다.
근대 자유주의는 일관되게 범신론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범신론적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뚜렷한 구별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져오며, 특히 이것은 “죄의식의 상실”이란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은 더 이상 거룩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며, 신도, 죄도, 단지 근대적 사고에 살짝 기대고 있을 뿐이다. 메이첸은 이러한 근대 사고의 변화를 촉진하는 요인을 식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8)이 끝난 직후에 책을 집필하면서, 전쟁이 자신의 죄보다는 다른 이들의 죄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고 보았다. 전쟁 중에는 상대편을 악의 화신으로 보며,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악은 외면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의 집단주의도 문제가 된다. 모든 사람이 전쟁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죄의식”이 모호해진다. 하지만 메이첸은 죄의 교리 변화의 이면에서 더 사악한 원인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이교주의다. 메이첸이 말하는 이교주의란 야만주의가 아니다. 그리스 제국의 전성기에 이교주의는 기괴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인간 존재의 가장 높은 목표는 현존하는 인간 기량의 건강하고 조화롭고 즐거운 개발”에서 찾는 것이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이었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정신과 육체의 적절한 훈련을 통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그 당시 이런 관점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런 관점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상반되는 죄성과 죄책감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을 대체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기독교의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에 대한 정반대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이교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인 반면, 기독교는 상한 심령을 말하는 종교이다.” 메이첸에 따르면 이교주의의 문제는 죄를 마음속에 덮어두고 자기 안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마음속의 죄를 드러내고 자기 밖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이교주의는 기독교의 좋은 소식을 박탈하고 그 자리를 좋은 조언이나 좋은 격려로 대체했다. 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기만 있으면 된다. 경건한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좋은 대응이 필요하다. 메이첸은 근대 자유주의 설교자가 말하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여러분은 매우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지역의 사회 복지를 위한 모든 요구에 응하고 있습니다. 성경, 특히 예수님의 생애에는 선한 것이 있으며, 그것은 선한 사람들인 여러분들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메이첸 시대에는 선행주의가 구세주의 좋은 소식을 쫓아내 버렸다.
근대 자유주의에 대한 메이첸의 빈틈없고 통찰력 있는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교회의 반응도 메이첸 시대와 동일해야 한다.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됨을 재확인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말하고 있다.
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확언으로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성경의 첫 문장에서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추론할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여럿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복합적이지 않고 단순하시다.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시다.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다. 유한하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다. 변하실 수 없으므로 불변하시다. 무엇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고 자존하신다.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자신 안에 생명이 있으시다. 필멸의 존재가 아니라 불멸의 존재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구별된 초월적인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그 창조주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즐거워하도록 부르셨다. 창조가 시작된 이래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해왔던 일이 바로 이것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3)
둘째,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거룩함과 죄의 구별이 있게 되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구별되었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본래의 의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는 시험 아래 있었으므로 교제의 관계는 상실될 가능성이 있었다. 아담의 범법을 통해 인류는 죄인의 상태가 되었고, 교제는 깨졌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만큼이나 무한히 컸던 심연은 이제 훨씬 더 심각해졌다. 이사야 선지자의 성전 환상은 이 거룩함과 죄의 구별의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들었을 때 그는 “우와!”라고 반응했지만,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빛 속에서 자신의 죄된 본성을 깨달았을 때 “화로다!”라고 반응한다(사 6:1~5).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본래의 창조적 실재를 반영한다면, 거룩함과 죄의 구별은 현재의 실존적 실재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는 인류가 큰 곤경에 직면해 있음을 드러낸다. 거룩하신 창조주와 죄악된 피조물 사이의 교제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기독교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신인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이셨고 동시에 참된 인간이셨다. 따라서 그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실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기독교의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이첸이 그토록 용감하게 옹호하고, 근대 자유주의가 여전히 맹렬히 반대하는 정통 기독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