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인간
2024년 06월 29일그리스도
2024년 07월 06일성경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외치는 종교개혁의 싸움은 치열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가장 치열한 싸움이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순수한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질문의 기저에는 “누가 말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권위에 대한 질문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 않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성경과 전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결정하고, 신앙과 이해에 관한 최종적인 말씀을 전달하면서, 진리의 최종 무오류 중재자로서의 목소리를 분명히 해왔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최종적이고 무오한 목소리는 교도권(주교와 교황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속하며, 교황이 권위를 가지고(ex cathedra) 말할 때는 특별히 구별된다.
종교개혁자들은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신적 이성에 기초해서… 교회와 교회 직분자가 성경보다 위에 앉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말씀의 창조물(creatura verbi)이다. 따라서 교회와 모든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속하는 권위를 빼앗고, 교회의 파생적 권위를 결정적 권위로 바꾸고 왜곡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전통과 성경이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일관되게 배격하고, 교황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무오성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거부했다. 오직 성경(솔라 스크립투라)만이 무오성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최고의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 장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을 꿇지 않으려는 인류의 끈질긴 거부의 한 표현일 뿐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그레샴 메이첸은 말씀을 거스르는 새롭고 가공할 만한 적, 즉 자유주의 신학과 직면했다. 이 적은 종교개혁자들 이전의 상대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크고 영향력이 강했으며 매우 위험했다. 메이첸은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성경의 의식적 권위 아래 루터와 같은 결의로 “신약성경의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교회와 함께 그분을 거부할 것인가?”라고 용감하게 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 있었다. 그리고 주요 교회가 여기에 물들고 말았다.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으로 인해 물의를 빚은 근본주의 기독교는 문화적 웃음거리가 되었고,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922년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의 유명한 설교,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는 관용의 최고 법칙을 주장하면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교리가 비합리적이라는 그의 인식을 은근히 드러냈다. 포스딕은 모두가 함께 잘 지내자고 간청했다.
그가 성경으로 돌아선 이유는, 성경이 단순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신적인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포스딕과 그의 자유주의 동료들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확고한 교리를 받아들였으니 얼마나 놀랍도록 관용적인가? 하지만 포스딕은 신앙의 근본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따뜻함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사랑에는 경계가 있고 정의가 필요하다. 메이첸은, “인간의 애정은 겉보기에는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리로 가득 차 있다.”고 훌륭하게 분별해냈다.
메이첸의 유명한 지적처럼, 자유주의 신학은, 업그레이드된 기독교가 아니라 당시의 자연주의/인본주의 교리 속에 자리 잡은, 완전히 다른 종교였다.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새로운 종교, 새로운 교리, 자칭 권위를 훌륭하게 폭로했다. 자유주의는 “하나님, 인간, 권위의 자리, 구원의 길에 대한 관점이 기독교와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메이첸은 자유주의 교회가 이 “권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그가 성경으로 돌아선 이유는, 성경이 단순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신적인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벧후 1:19-21),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음성이며(딤후 3:16), “다른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시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그리스도인이 경배하는 분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은 절대적으로 “참된 기록”이라는 사실로 위안을 얻었다. 하나님이 진리시라면 그분의 말씀도 모두 진리이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완전 영감 교리(plenary inspiration)는 성경 자체와 예수님 자신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의 자리에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한 메이첸은 예리한 통찰력, 진심어린 연민,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킬 정도의 명료함으로 말했다. 그는 자유주의의 교리, 즉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거부, 죄의 제거, 인류의 궁극적 선에 대한 오만한 허풍, 따뜻한 관용의 신기루 뒤에 숨은 역사 신학의 비뚤어진 퇴색,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영적 지도자로 만드는 교묘한 변질에 도전했다. 당시의 지배적인 목소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권보다는 “죄 많은 인간의 변화하는 감정에 기초한” 신학적 자유주의였다.
주류 교단들은 변화하는 정서의 모래사장에 발을 딛고 새롭게 찾은 자유를 축하했다. 성경은 사람이 만든 책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죄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정의, 고대 교리의 족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시대에 뒤떨어졌고,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에 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레샴 메이첸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으로, 그는 어둠을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 일어섰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1세기의 유대인 선생은 결코 우리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현대 연구의 모든 예술로 그분께 옷을 입히고, 현대적 감성의 따뜻하고 기만적인 칼슘 광(光)을 그분께 던지라. 그러면 모든 상식이 다시 제 권리를 되찾을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잠깐 동안의 자기기만은 절망적인 환멸의 복수를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찾았다고 믿었다. 메이첸은 “하나님의 복된 뜻으로부터의 해방은 언제나 더 나쁜 주인의 속박을 수반한다.”라고 항변했다.
성경에 온전히 안착할 때 오는 하나님이 주신 활력은, 고집스러운 폐쇄적 사고로 비난을 받았지만, 메이첸에게는 불을 지폈으며 모든 신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책에 의존하는 것은 죽은 것이라거나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말자.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여 시작되었지만 전 세계를 불태웠다. 사람의 말에 의존하는 것은 노예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없다면 세상은 어둡고 우울한 곳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부담스러운 법이 아니라 기독교 자유의 헌장이다.
그런 자유 속에서 메이첸은 안전하게 서 있었고, 그런 자유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폭풍우를 견디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시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