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언약 파기와 하나님 형상의 회복
2024년 02월 24일
모든 권위를 가지신 머리
2024년 03월 02일기독교 인간론과 도덕적 삶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인간론”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기독교 저술가들은 때때로 교리와 윤리가 함께 가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신학의 모든 영역이 도덕적 함의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교리(인간론)는 특히 도덕적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분리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행동 방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인간 본성과 일치한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이 기독교 윤리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도전한다. 기독교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과한 규칙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로하여금 많은 재미와 즐거움, 이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자의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법을 명령할 때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본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성도 반영한다. 그분의 도덕적 의지는,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신 방식과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부합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즐거운 것을 누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구속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다.
물론 죄가 관영한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께 충실하기 위해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삶이므로 인생의 시련과 상실이 있더라도 그 속에서 참된 만족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사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삶의 방식과 상반된 삶을 살기 때문에 인간에게 깊은 불행과 불만족만 남긴다. 새가 말처럼 살려고 노력하면 만족을 찾을 수 없고, 말이 물고기처럼 살려고 노력하면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완벽하게 맞는 하나님의 법칙을 거스르며 살려고 하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도덕성에서 중요하고 논란이 많은 네 가지 영역인 일, 성과 성별(sex and gender), 인종,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
집 안에서 일을 하든, 밖에서 일을 하든, 직업으로 소득을 얻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우리는 이를 단순히 청구서를 납부하고, 식구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필요성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성경이 자주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의 관점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잠 6:6-11, 살전 4:11-12, 살후 3:6-12). 필요성과 도덕적 의무는 분명 일에 대한 정당한 동기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동기가 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인간을 일하는 피조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성에 부합하는 행위이다.
창세기 1장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하나님을 일꾼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고, 적절한 순서로 배치하시고, 이름을 지어 주시고, 할 일을 주셨다. 그는 게으르고 방종한 독재자가 아니라 바쁘고 생산적인 일꾼이시다. 따라서 그분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즉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일을 주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창 1:26, 28).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은 생산적인 노동에 대한 소명을 수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노동을 명령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과 성별 혁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반역이자 현실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다. 사람을 서로 다른 인종으로 나누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의 진실을 무시하는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이것은 어떤 이유로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종종 깊은 상실감을 느끼거나 방향 감각을 잃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장애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간절히 기대하지만, 정작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삶의 의미가 사라짐을 느끼기 시작한다. 헌신적인 주부들도 자녀가 성장하여 집을 떠나면 목적의식의 상실로 마음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삶을 보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 현실은 공허한 것으로 드러난다.
전 세계는 지난 몇 년 동안 코로나19와 정부의 제한 조치로 인해 경제활동이 중단되면서 불안함 가운데 이러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고, 어떤 일자리는 비정상적으로 위험하고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정부의 억제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는 생산적인 직업을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신 건강 문제와 약물 남용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팬데믹 제한 조치가 해제되었지만, 전반적인 노동력 참여율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주요 근로 연령의 많은 남성들이 아예 직장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나 공공 정책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의 핵심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일하기를 갈망하는 본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노동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때 부수적인 피해는 클 수밖에 없다.
성과 성별(sex and gender)
기독교인들이 서구 사회의 문화적 주류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성과 성별의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때때로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하면서까지 조롱과 소외를 감수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성과 성별은 정말 중요하며,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 및 성별 혁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반역이자 현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방식의 현실에 대한 거대한 부정이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 19:4)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 기록된 결혼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19:4-12, 막 10:1-12). 예수님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결혼의 영속성과 이혼의 부도덕성에 대해 구약성서 이상의 증거 텍스트를 제공하셨다. 그분은 또한 성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법이 창조 질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방식에 근거해 결혼이 지속적이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자녀를 낳는 이성애적 결혼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성경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었다(창 1:26).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인 우리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이다(27절).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는 방법은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두 가지뿐이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분명하고 신비하게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창세기 2장은 가장 중요한 방식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완벽하게 “적합”(2:18)한 방식으로 여자를 창조하셔서 두 사람이 영구적이고 성적인 열매를 맺는 “한 몸”의 관계인 결혼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하셨다(22-24절).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만이 이렇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고려 사항은 다음 세대를 훈련할 때 강조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우리 어린이와 청년들은 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완화해야 한다는 큰 압박에 직면해 있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고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엄격한 규칙을 부과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성에 관한 그분의 법은 가장 참된 인간이 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다른 방식이 가져오는 죄책감, 후회, 분노 없이 우리의 성적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설명한다. 과식, 과음, 분노 폭발은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결국 본인(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성과 성별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성별을 선택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은 일시적인 감각의 만족과 자유를 줄지 모른다. 결혼 관계 밖에서 성적 욕망에 빠지는 것은 일시적인 쾌락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본성에 맞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한다.
인종
인종 문제는 성과 성별 문제와 함께 현대 문화에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경우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흐름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문화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한다고 선언할 때 기독교인들은 기꺼이 동참할 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교회의 실패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종은 인간의 본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도덕적 문제다. 기독교 인류학적 렌즈를 통해 이 문제를 성찰하면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한 가지 차원에서 기독교 인간론은 인종 차별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한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피부색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혈통 때문에 동료 인간을 정복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이 심오한 사실을 무시하고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모욕하는 것이다. 아무리 교묘하게 합리화해도 인종주의는 이 치명적인 반대의 이유를 피해 갈 수 없다. 비기독교인은 보편적인 인간 존엄성을 근거로 인종차별을 비난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인종차별을 비판할 가장 심오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인간론은 좀 더 깊은 분석을 요구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같은 혈통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피”(행 17:26의 문자적 번역대로)로 만드셨고, 한 언약의 머리인 첫 아담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다른 언약의 머리인 마지막 아담 아래에서 오직 하나의 구원의 희망을 소유하게 하셨다(롬 5:12-19, 고전 15:21-22, 45-49).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공통의 본성을 공유하므로, 인류는 진정으로 하나이다. 성경은 여러 인간 집단이 민족이나 국가(예: 애굽인, 히타이트인, 앗수르인, 바빌로니아인)로 뭉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인종”에 속한다고 묘사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성경은 “백인” 인종, “흑인” 인종 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현대의 유전 과학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들은 전 세계 사람들의 유전적 구성을 조사하고 비교하고, 우리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많은 사람의 유전적 유적을 연구하면서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뚜렷한 소수의 인종으로 나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류는 서로 아주 잘 연관되어 있는 단일 종족이다.
사람을 뚜렷한 인종으로 나누는 것은 신학적으로 보든, 과학적으로 보든, 인간 본성의 진실을 무시하는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사람을 인종으로 나누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다른 성별을 발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수 세기에 걸친 인종차별이 초래한 상처를 치유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아주 어렵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다. 기독교인들이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때때로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인간론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이상 서로를 다른 인종에 속한 것처럼 말하거나 대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이 문제에 있어 특히 교회가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인간 생명의 가치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이슈가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인간 생명의 가치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동료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심각하고 파괴적이며 최종적인 잘못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성찰로 도덕적 삶에 대한 인간론적 연구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전 세계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에서 들려오는 보도와 영상에 경악하고 있다. 나를 비롯해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큰 축복이지만 현실에 대한 잘못 인식하게 할 줄 수 있다. 타락한 세상은 폭력적인 장소이다. 죄가 너무 심해서 사람들은 종종 무자비하고 뻔뻔한 방법으로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다. 특히 전쟁에서의 살인은 개인의 생명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경제와 환경을 황폐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언약의 일반 은혜를 통해 우리의 현재 생명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새 언약의 보혈을 통해 영원한 생명도 허락하신다.
이전 주제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은 이미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창 1:26-27). 따라서 모든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공격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 6절은 여기에 미묘하고 중요한 내용을 추가한다. 폭력으로 인해 하나님이 내린 대홍수(6:11 참조) 이후, 하나님은 노아와, 남은 역사 동안 온 세상과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리기로 언약을 맺으셨다(8:21-9:17). 이 언약의 일환으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9:6) 이 공식에 따르면 각 사람의 피는 똑같이 가치가 있다. 다른 사람의 피를 불법적으로 흘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가해자가 왕이고 피해자가 신하이든, 그 반대의 경우이든 상관없다. 사람의 피는 사람의 피이며, 사람을 죽인 행위는 정당한 보복을 받아야 한다.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생명도 보호해야 한다. 여기서 특히 낙태의 악함이 드러난다. 태아보다 더 취약한 존재는 없으며, 창세기 9장 6절의 정의는 태아에게도 적용된다.
창세기 9장 6절의 문맥은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를 위해 주목할 가치가 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인간의 유혈 사태를 복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의를 집행하는 도구로 임명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임무를 (타락한)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내재적 존엄성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폭력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법률 시스템과 정당한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 및 기타의 것들을 지지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것은, 지배권을 행사하라는 부르심에 부응하며(1:26), 동시에 이를 위해 타락한 세상에서 악에 맞서 정의를 증진해야 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여러 가지 목적을 생각해 보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영원한 복을 얻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상도 다스리도록 만드셨다(히 2:5). 우리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새로운 창조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아들을 우리가 있는 낮고 낮은 이곳에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게 하셨다(5-10절). 하나님께서는 노아 언약의 일반 은총을 통해 우리의 현재 생명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새 언약의 보혈을 통해 영원한 생명도 허락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삶이 아무리 소중해도 감히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마 16:2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죽도록 충성”한다(계 2:10). 최고의 운명인 이 사실을 높이지 않고는 기독교 인간론이 완성될 수 없다. 참으로 “참된 생명을 취하자”(딤전 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