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주의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산다는 것
2022년 04월 23일
장차 올 세상 안에서 살기
2022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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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주의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두 세계 사이에서“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나는 캘리포니아를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이곳은 아메리카 합중국(the Union)에서 가장 위대한 주였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최근 캘리포니아는 삶의 질 조사에서 꼴찌로 평가되었다. 고속도로는 과밀하고 사람들은 과중한 세금을 내고 생활비는 사상 최고 수준이다. 아이다호(Idaho)로 가서 농장을 사서 사람들과 문제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넓은 땅에서 살고 싶다.

나는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위해서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설명했던 이런 태도는 많은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캘리포니아”를 “세상”으로 대체하고 동일한 상황을 적용해보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에 크게 낙담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사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분리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농장’이 터무니 없는 생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는 물론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문제를 피하고 싶다는 이유로 이동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분리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는가(고후 6:14-18)?’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세상에서 물러나서 믿지 않는 자들과 어떤 접촉도 하지 말라고 부름 받았는가?’

이런 부르심이 우리가 수도원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문제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그 자체가 ‘수도원주의’라고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종류의 분리는 매우 세속적인 추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약속된 영광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여기게 한다. 또한, 이런 식의 분리는 이 세상에, 우리는 세상을 신경 쓰지 않고 단지 도망치고 싶을 뿐이라는 초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 분리를 추구한다면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과 분리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있게 고찰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와서 분리하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이 되라는 요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항상 고심했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고전적 범주를 사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문화에 대항하거나 문화에 동화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기를 원하지만, 그만큼 또한 쉽게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기독교인에게 요구하는 분리는 어떤 것일까?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본다면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세속성을 억제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런 증상 중 일부는 악한 분열, 세속적인 사역 방법, 예배에서의 이교 관행, 영적 은사의 남용, 성적 부도덕, 거짓 교리의 관용이 포함되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바울의 목표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적절하게 분리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5:1절에서 바울은 추한 성적 부도덕함이 교회 안에서 용인되고 있다는 보고를 다룬다. 교회가 교회 징계를 행사하여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들이 가진 지위를 손상시키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함께 결속하기로 다짐한 크리스천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될 것을 요구할 때 바울은 놀랍게도 구약 성경과 관련을 지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바울은 구별되라는 요구의 근거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에서 찾았다. 무교절과 함께 유월절은 죽음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것과 애굽 땅에서 그들이 분리되었던 것을 기념했다. 이전 삶의 방식에서 그들 가운데 다시 되돌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그들의 지위에 대한 위협이었다. 이스라엘처럼 교회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후 6:17).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결코 애굽이 그들 가운데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구별의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들은 구별되라는 바울의 요구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도덕으로 우리만의 작은 종파 집단이라도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에 있는 차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다. 

바울의 답변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그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은 그들이 이 세상의 죄인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승려들이 세상을 떠나려고 했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을 피한다고 해서 온전한 구별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신자들은 친교라는 방식으로 구별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오직 신자들만이 독특하게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있다.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와 세상을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세상은 항상 그대로일 것이다. 이 세상은 종종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가치와 매력 그리고 지식의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우리는 세상과의 교제를 떠났고, 다른 세상에 합류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전 사랑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런 진리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물러나거나 이 세상 사람과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불신자들과 섞이는 것을 피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이 땅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천국 시민권에 반대되는 삶의 방식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도록 요청된다. 구원받기 이전의 삶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천상의 지위와 세상 앞에서의 행동 방식에서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 실패했던 지점이다. 그들은 신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누군가를 그들의 교제권로 들어오게 했다. 교회가 이전의 삶의 방식에서 구별되는 것을 거부한 것은 교회와 세상이 결합한 결과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고전 5:11)에게서 갈라서라고 요구했다. 주님은 신자라고 주장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지음으로 기독교 신앙과 삶에 모순되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그들과의 교제를 끊음으로써 구별된다.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감과 보살핌, 그리고 참여는 회개하고 복음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공유될 수 없다.

고린도 교회는 징계를 통해 이렇게 분리를 이루어내야 했다. 그런 사람을 다시 세상에 내어줌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구분된 지위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을까? 물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이상 그와 기독교인으로서의 교제를 갖지는 않았다. 그들이 세상에서 믿는 자로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세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별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될 것인가?

이런 원칙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성경적 구별됨에 관해 기독교인들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오늘날 교회는 구별되라는 부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회개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교회가 많은 불신자에게 회원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신실하지 못했고, 이로인해 불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임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했다. 메이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외부의 적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들에게서 온다. 그것은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철저히 반기독교적인 신앙과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에서 이 두 진영의 분리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부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에서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교회는 믿음과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 세상과 매우 다르게 보여야 한다. 많은 교회가 그들 가운데서 “아간”을 쫓아냄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수 7장을 보라). 

둘째, 기독교인들은 구별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그들 자신과 세상을 분리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에서 분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연합해야 하고, 우리의 신념 때문에 추해지는 것은 피해야하고, 양심의 자유에 맡길 수 있는 부분에서는 분열을 일으키지 말고 차이를 허용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함께 결속하기로 다짐한 크리스천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들은 말씀에 의해 변화 받는 데 헌신적이고, 진리를 위해서 일어섬으로 지속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증인됨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신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 특별히 기도하셨다(요 17:15). 주님은 자신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셨다. 불신자들은 복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세상은 우리에 대해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축복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충분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보는가? 우리의 답은 십자가의 메시지 안에 있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우리가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교제에 들어오길 원하겠는가? 올바른 구별됨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간다. 그리고 우리의 증인된 삶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존하시는 이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나는 캘리포니아를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얻어내고자 한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구별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별된 곳이라면, 바로 그곳에서 작은 천국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모든 곳에 이것이 필요하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크리스토퍼 고든
크리스토퍼 고든
크리스토퍼 고든(Rev. Christopher) 목사는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Escondido, California)에 있는 에스콘디도 연합 개혁 교회(Escondido United Reformed Church)의 담임 목사이고 어바운딩 그레이스 라디오(Abounding Grace Radio) 진행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