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조

(The Canons of Dordt)


항론파에 반대하는 다섯 조항, 혹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벌어진 논쟁의 다섯 교리에 대하여 1618-1619년에 열린 네덜란드 개혁교회 도르트레흐트 총회의 판단

역사적 서문

우리의 주(主)이시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힘든 순례의 여정을 수행하며 전투하는 그분의 교회에 참으로 많은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로의 말씀은 당연히 주님께서 성부께로 가시려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기 전에 남기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하리라”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 고귀한 약속이 참됨은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공격을 받아 왔는데, 원수들이 공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이단들이 불신앙으로 맹렬히 도전하였으며, 그뿐만 아니라 유혹하는 자들이 위장하고서 교묘하게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교회를 한시라도 그냥 버려두시고 약속하신 대로 교회와 함께하시면서 구원의 도움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참으로 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폭군의 권력에 의해 질식당하고 속이는 자들의 간계로 인해 파멸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양 떼를 지극히 신실하신 인애로써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신 선한 목자께서는 언제나 적당한 때에, 때로는 이적적인 방식으로 손을 펴시어 핍박하는 자들의 분노를 누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유혹하는 자들의 굽은 길과 거짓된 조언을 드러내시고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경우에서 주님께서는 참으로 주님의 교회와 함께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황제와 왕들과 제후들의 이야기에서 그러한 증거를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종종 그러한 분들을 일으키셔서 그분의 교회를 돕게 하셨고, 그들은 주님의 집에 대한 거룩한 열심을 품고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주님께서는 폭군들의 분노가 어떤 선을 넘지 않도록 누르셨을 뿐 아니라, 또한 교회가 거짓 선생들과 싸워야 할 때에는 거룩한 총회들이 열리게 하셔서 그러한 방식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 총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은 함께 기도와 의논과 수고를 감당하여서, 사탄의 종들이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더라도 그들에 대항하여서 교회와 하나님의 진리를 변호하는 일을 감연히 수행하였습니다. 거룩한 총회들은 오류와 분열의 씨를 제거하였고, 교회가 참된 경건함으로 통일이 되도록 보존하였으며, 정순한 믿음이 오염되지 않게 하여 후대에 물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님께서는 동일한 인자하심으로써 여러 해 동안 심한 핍박을 받던 네덜란드 교회에도 은혜로 함께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이 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적그리스도적인 통치와 교황 제도의 가공할 우상 숭배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그 오랜 전쟁 기간에 이 교회는 아주 여러 번 이적적인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된 교리와 권징으로 하나 됨을 이루면서 매우 경이로울 정도로 번성하였는데, 네덜란드 공화국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세계에 있는 모든 개혁교회에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 곧 항론파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에 의하여서 처음에는 은밀하게 후에는 공개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옛적의 오류들과 새로운 오류들을 들고 와서 개혁교회를 핍박하였고, 공격적인 논쟁들과 분열들로 인하여서 그렇게 안정적이던 교회가 지속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가공할 만큼 격렬한 논쟁과 불일치라는 불길 때문에 그렇게 번성하던 교회가 소멸될 것 같은 큰 위험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구주님께서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서 적절한 시기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참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영원히 찬송합시다. 우리가 여러 가지로 주님의 진노를 촉발하였기에 주님께서는 잠시 동안 우리에게서 그 얼굴을 감추셨지만, 잠시 후에는 주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잊지 않고 계시며 자기 백성의 탄식을 멸시하지 않으심을 온 세상 앞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회복될 가망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네덜란드 연방의 의회에 그리고 고명(高明)하고 매우 유능한 지도자들의 마음에, 이 걷잡을 수 없이 어려운 문제들을 법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생각을 넣어 주셨습니다. 고명하신 오란여 공의 충고로 택한 그 수단은 사도들 자신의 예에서, 그리고 이후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매우 잘 알려진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네덜란드 교회도 그러한 방식으로써 선한 결과들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의회의 권위로 도르트레흐트에서 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고 네덜란드 모든 주에서 보낸 대표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총회는 미리 매우 뛰어난 신학자들을 초청해 두었는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위대하고 능력 있는 왕인 제임스와 그 외에 고명하신 여러 군주와 백작, 그리고 강력한 공화국들의 호의로 많은 신학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학자들이 한자리에 많이 모인 저명한 총회에서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교훈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면밀히 숙고하고 공통된 판단을 내리도록 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판단을 내려서 참된 교리를 확증하고 거짓 교리를 거부하며,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네덜란드 교회 안에 하나 됨과 평화와 안온함이 다시 회복되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복 주심에 대하여 네덜란드 교회는 기뻐하고, 또한 교회의 구주이신 주님의 신실하신 자비를 겸손히 인정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합니다.

먼저 행정관들이 모임을 소집하였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그분의 자비로우신 도우심을 내리시기를 구하면서 모두 금식하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도르트레흐트에서의 거룩한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가운데 교회의 안녕을 열망하며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당면한 사안을 검토하고 판단할 때에 오직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만 판단하고, 선하고 진실된 양심으로만 행할 것을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거룩히 서약하였습니다. 그렇게 맹세한 후에 그들은, 이미 소환되어 있던 자들 곧 당면한 교리들의 주요 옹호자들에게 잘 알려진 그 다섯 교리들과 그 교리를 위한 논증들에 대하여 그들의 생각을 충분히 밝히도록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큰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총회의 판단 권리를 거부하였고 문제가 되는 점들에 대하여 합당한 방식으로 대답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총회의 권고나 의회 대표단의 결정이나 고명하신 의원들의 말도 아무런 진전을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총회는 의회 지도자들의 지시와 과거 종교회의들의 관례에 따라서 다른 길을 택해야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총회는 앞에서 언급한 다섯 교리에 대한 그들의 글과 고백서, 그리고 선언서를 검토하되 이미 출판된 것들과 총회에 제출한 자료들을 검토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이 검토의 과정이 완결되었습니다. 참여한 모든 사람이 크나큰 열심과 신실함과 양심으로 일하였고, 모든 이들의 의견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의 진리가 올바르게 보존되게 하며, 양심이 확신을 얻게 하고, 네덜란드 교회의 평화와 안녕을 이루기 위하여서, 총회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공적으로 드러내어 선언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판단에서 교리의 다섯 주제에 대한 참된 뜻을 선언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거짓된 견해들은 반박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조.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아 마땅함
사람은 모두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죄와 저주 아래에 그대로 두시고 그 죄 때문에 심판하신다 하더라도, 그분이 조금이라도 불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항상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제2조.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제3조. 복음 설교
사람이 믿음에 이르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이 큰 기쁜 소식의 전파자를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 보내십니다. 복음 전파자의 사역으로 사람들은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제4조. 이중적 결과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에서부터 구원을 얻고, 또한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제5조. 불신의 원인과 믿음의 근원
그러한 불신의 원인은 결코 하나님께 있지 않으며, 불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분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제6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선물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데, 그러한 일은 그분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자기의 일을 아시고’(행 15:18),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役事)”(엡 1:11)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작정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의 마음을 은혜로 부드럽게 만드시고, 그들의 마음이 아무리 강퍅하여도 부드럽게 하셔서 그들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일한 작정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택하지 않은 자들을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들 자신의 사악함과 강퍅함 가운데 내버려두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동일하게 정죄받아 마땅한 사람들 사이를 구분 짓는, 심오하고 자비로우며 동시에 공의로운 구별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과 유기(遺棄)의 작정인데, 이 작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 마음이 사악하고 불순하며 정함이 없는 자들은 이 작정을 왜곡하여 멸망을 자초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영혼들에게는 이 작정의 교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줍니다.

제7조. 선택의 정의(定義)
선택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목적인데,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분의 주권적이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순전히 은혜로 어떤 사람들 곧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원래의 순결함을 상실하고 죄와 파멸로 떨어진 모든 인류 가운데서 확정된 숫자의 구체적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택하심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낫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도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비참함에 함께 버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신 사람들의 중보자와 머리로 삼으시고 구원의 근거로 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게 하시려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그분의 말씀과 성신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이끄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실 것과, 또한 그들이 아드님과의 교제 가운데 거하도록 강하게 붙드시고 이후에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고 그 영광스러운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제8조. 선택에 관한 하나의 작정
이 선택에 관한 작정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옛 언약과 새 언약 아래에서 구원 얻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하나의 동일한 작정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밝히 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뜻하신 선한 기쁨과 목적과 경영은 하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와 영광에 이르도록, 또한 우리가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의 길로 행하도록 우리를 영원 전에 택하셨습니다.

제9조. 선택의 근거는 예지(豫知)가 아님
이러한 선택은 사람의 믿음이나 그 믿음의 순종, 거룩함, 혹은 다른 어떤 선한 자질이나 성향을 미리 보시고, 그것들을 선택하심에 요구되는 인간의 조건이나 명분으로 삼으시고 그 터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과 믿음의 순종, 거룩함 등에 이르게 하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고, 여기에서부터 믿음과 거룩함을 비롯한 구원의 여러 선물들이 나오며, 마지막으로는 영생 그 자체가 선택의 열매와 효과로서 흘러나옵니다. 사도가 증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제10조. 선택의 근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이 은혜로운 선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있습니다. 이 선하신 뜻은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한 조건들 가운데서 사람의 어떠한 자질이나 행위를 택하여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삼으신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죄인들의 무리 가운데서 특별히 어떤 사람들을 그분의 소유로 삼으신 사실에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또한 성경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하고 말합니다.

제11조. 그분의 선택은 변치 않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불변하시고 또한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선택하심이 중단되거나 다시 시작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변질되거나 철회되거나 무효가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택함받은 사람이 버림을 받거나 그 숫자가 줄어드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제12조. 선택에 대한 확신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선택으로 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정하신 사실을, 비록 다양한 단계를 거치고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분의 때에 확신하게 됩니다. 이 확신은 하나님의 오묘하고 감추어진 것을 호기심으로 꼬치꼬치 캐물음으로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택의 필연적 열매들이라고 가르쳐 준 것들이 자기들 안에 있음을 성신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관찰함으로써 얻게 되는데, 그 열매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 자기의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13조. 선택을 확신하는 것의 가치
이러한 선택을 깨달아 알고 확신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더욱 겸비케 하고, 그분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비하심을 찬양하며, 자기 자신을 더욱 정결케 하고, 그처럼 큰 사랑을 먼저 보이신 주님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택의 교리나 이 교리에 대한 묵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무관심하게 만들거나 그들에게 거짓된 육신적 안정감을 준다는 비난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가운데서, 그러한 일은 오히려 자신이 선택의 은혜를 받았다고 경솔하게 추정하고 게으르면서도 대담하게 큰 말들을 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제14조. 선택의 교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이 교리는 그분의 지극히 지혜로운 작정을 따라서, 구약과 신약 시대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하였고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전하셨으며, 이후로는 그 전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 교리를 하나님의 교회, 곧 이 교리의 특별한 대상인 교회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가르치되 지극히 높으신 분의 길을 호기심으로 캐묻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을 가지고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해야 하며,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에 영광이 되고 그분의 백성에게는 살아있는 위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15조. 유기의 작정
성경은 우리를 택하신 이 영원하고 과분한 은혜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데, 특히 모든 사람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선택되지 않았다고 증언할 때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원한 선택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지나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지극히 자유롭고 지극히 공의로우며 흠이 없고 변치 않는 그 선하신 기쁨 가운데서, 자기들의 잘못으로 인해 떨어진 그 공통의 비참함 가운데 그들을 그냥 버려두시고 구원의 믿음과 회심의 은혜를 그들에게는 베풀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들의 갈 길을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고 그분의 의로운 심판 아래 두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그들을 정죄하시고 영원히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그렇게 하심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죄악들 때문이고, 그분의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유기의 작정인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고(그러한 생각 자체가 신성모독입니다!), 오히려 두려워할 분이시며 흠이 없고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자 보복하시는 분으로 선언합니다.

제16조. 유기의 교리에 대한 다양한 반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살아있는 믿음과 견고한 내적 확신,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평안함, 어린아이 같은 열성적인 순종,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 등이 자기 안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주신 방도(方途)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유기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유기된 자들 중 하나로 간주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부지런히 그러한 방도들을 사용해야 하고, 더 풍성한 은혜의 때를 열렬히 갈망해야 하며, 경외심과 겸손한 태도로 그 은혜가 임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이키고 그분만을 기쁘시게 하며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라는 만큼의 경건과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유기의 교리를 들을 때에 더더욱 두려워 떨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히 여기고 세상의 염려와 죄악 된 욕심에 자기를 맡겨 버립니다. 그러한 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한, 유기의 교훈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17조. 유아 때에 죽은 신자의 자녀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 말씀은 신자의 자녀가 거룩하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은혜 언약에 의하여 거룩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생에서 데려가시는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18조. 불평이 아니라 찬양함
무가치한 자들을 택하시는 이 은혜와 공의롭게 유기하시는 엄중함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도의 말로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 또한 우리 구주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하지만 우리는 이 신비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면서 사도와 같이 외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오류들을 배격함

선택과 유기의 참된 교리를 설명하였으므로, 이제 대회는 다음과 같은 오류들을 배격합니다.

1
오류: 믿고자 하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믿음의 순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구원으로 택하신 작정의 전부고 전체다. 이것 외에 다른 작정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았다.

반박: 이 오류는 교묘하게 속이는 것이고 성경의 교훈과 명백히 어긋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선언할 뿐 아니라, 확정된 수의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택하셨다고도 선언합니다. 이 시간계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견인을 그분의 택하신 자들에게 내려 주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함이라”(엡 1:4).

2
오류: 영생으로 정하신 하나님의 선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적이고 불확정적인 선택이 있고, 특별하고 확정적인 선택이 있으며, 후자는 다시 불완전하고 취소할 수 있고 결정적이지 않으며 조건적인 선택과, 완전하고 취소할 수 없고 결정적이며 절대적인 선택으로 나뉜다. 이와 유사하게 믿음으로의 선택과 구원으로의 선택을 구분하기도 한다. 즉 의롭다 하는 믿음으로 택하시는 것이 반드시 구원으로 선택하신 것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반박: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가 조금도 없이 그저 사람의 머리에서 지어 낸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선택의 교리를 변질시키고,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구원의 황금 사슬을 깨뜨립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3
오류: 선택의 교리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택하시고 다른 이들은 택하지 않으셨다는 데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모든 조건들(예를 들어 율법의 행위와 같은 조건들)로부터 믿음의 불완전한 순종과 그 자체로는 효력이 없는 믿음의 행위를 택하시거나 선별하셔서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기를 기뻐하셨다 그러한 믿음을 그분은 은혜로써 온전한 순종으로 여겨 주시고 영생의 상급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반박: 이와 같은 치명적인 오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모든 효력을 앗아가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와 성경의 단순명료한 교훈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4
오류: 믿음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으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그 사람이 본성의 빛을 바르게 사용하여야 하며, 경건하고 겸손하고 온유하여야 하며 영생에 합당한 자라야 한다.

반박: 만일 그렇다면 선택이란 어느 정도 그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일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의 냄새가 나며, 에베소서 2:3-9에서 가르치는 사도의 교훈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5
오류: 불완전하고 결정적이지 않은 선택으로써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택하시는 일은, 그들에게서 믿음과 회개와 거룩함과 경건함이 시작되고 혹 얼마 동안 계속될 것을 미리 보신 터에서 이루어졌다. 반면에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그들이 믿음과 회개와 거룩함과 경건함을 끝까지 견인(堅忍)할 것을 미리 보신 터에서 이루어졌다. 택함을 받은 사람이 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므로, 이것이 은혜로운 복음적 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믿음과 믿음의 순종, 거룩함, 경건함, 견인과 같은 것들은 영광에 이르도록 택하신 불변의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완전한 선택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성취될 것을 미리 보시고 요구하시는 필요조건이자 근거다.

반박: 이러한 오류는 성경 전체와 충돌합니다. 성경은 항상 다음의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롬 1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

6
오류: 구원에 이르는 선택이 모두 변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선택된 자들 중에서 일부는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영원히 멸망당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박: 이 엄청난 오류는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분으로 만들고, 신자들이 선택되었다는 확신에서 얻는 위로를 파괴하며, 성경의 내용과도 상충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택하신 자들은 미혹될 수 없습니다(마 24:24).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 6:3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7
오류: 이생에서는 영광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을 받은 데에서 나오는 열매와 그러한 자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가변적이고 불확정적인 조건에 근거를 둔 것을 제외하고서는 확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반박: 불확실한 확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신자의 경험과도 상반됩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엡 1:3-14).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합니다(눅 10:20). 그들은 자기가 선택된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에 사탄이 화전(火箭)을 쏠 때에도 그에 맞서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롬 8:33) 하고 외칩니다.

8
오류: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분의 공의로운 뜻에 근거하여서 어떤 사람들을 아담의 타락한 상태와 그로 말미암은 모든 인류의 죄와 정죄의 상태에 버려두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그 공의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과 회심에 필요한 그러한 은혜를 내려 주지 않고 지나치기로 작정하신 것도 아니다.

반박: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가르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시느니라”(롬 9:18).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9
오류: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에게는 복음을 전하시고 다른 백성에게는 전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그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더 선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하면서 바로 그 주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15).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둘째 교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의 구속

제1조.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지극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말씀에서 계시하신 것처럼, 이제 그분의 공의는 그분의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지은 우리의 죄들에 대해서, 이 세상뿐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의 몸뿐 아니라 영혼도 반드시 형벌 받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않고서는 이러한 형벌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제2조. 독생자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그 만족을 이룰 수 없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한 자비하심으로 독생(獨生)하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고,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여기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제3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죄에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완전한 희생 제사와 속상(贖償)이며 그 무한한 가치와 효력은 온 세상의 죄를 충분히 속(贖)하고도 남을 만합니다.

제4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이유
이 죽으심에 그렇게 큰 가치와 효력이 있는 이유는,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으신 그분이 단지 참되고 완전하게 거룩하신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곧 성부와 성신과 함께 똑같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본질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속주는 바로 그러한 분이셔야 하였습니다. 이 죽으심에 그렇게 큰 가치와 효력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죄들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분이 그 죽으심에서 모두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제5조.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함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에게,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복음을 보내시는 자들에게 아무런 차별이나 예외 없이 선언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제6조.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
그런데 복음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회개하거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신앙 가운데서 멸망을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에 어떤 결함이나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입니다.

제7조. 어떤 사람들은 믿는 이유
그러나 참되게 믿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파멸에서부터 해방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유익을 받되,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받습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라도 갚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8조.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력
성자의 지극히 고귀한 죽으심이 지닌 효력, 곧 생명을 주고 구원을 베푸는 그 효력을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고, 오직 그들에게만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을 주시고, 이로써 그들이 확실하게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작정이고 가장 은혜로운 뜻과 의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께서 모든 민족과 족속과 나라와 언어 가운데서 영원 전부터 구원으로 택하시어 아드님에게 주신 모든 사람, 오직 그 사람들만을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확정하신 그 십자가의 보혈로써 효력 있게 구속하시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위하여 얻으신 믿음을 성신의 구원하시는 다른 은사들과 더불어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보혈로써 그들의 모든 죄, 곧 원죄와 자범죄, 믿기 이전의 죄와 믿은 이후의 죄를 모두 씻어 주시도록 하신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켜 주시고, 마지막에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영광스럽게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9조. 하나님의 작정의 성취
이러한 작정은 택하신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능력 있게 성취되어 왔고, 지옥의 문이 그 작정을 좌절시키려 헛되이 노력할지라도 계속하여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때에 하나로 합류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진 신자들의 교회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이 교회는 신랑으로서 신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서 변함없이 사랑하고 신실하게 섬길 것이고,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찬송할 것입니다.

오류들을 배격함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사람의 구속에 대하여 참된 교리를 설명하였으므로, 그 터에서 대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배격합니다.

1
오류: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셨으나, 어떤 특정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특별하고 확정적인 작정에서 하신 것은 아니다. 설사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속이 실제로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죽으심으로써 얻으신 그것은 필요하고 유익하며 가치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모든 면에서 여전히 완전하고 완벽하며 변함없을 것이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성부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모욕하는 것이며, 성경과 충돌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저희를 알며”(요 10:15, 27).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구세주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결국 이러한 오류는 보편적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조항과 상충됩니다.

2
오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은 그분의 보혈로 은혜의 새 언약을 실제로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은혜 언약이든 행위 언약이든 사람들과 다시 한 번 언약의 관계에 들어갈 권리를 성부를 위하여 얻기 위함이었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성경과 크게 어긋납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언약, 곧 새 언약의 보증과 중보자가 되셨다고 가르치고, 유언은 그 유언을 한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히 7:22; 9:15, 17).

3
오류: 그리스도의 속상(贖償)이 누군가의 구원 그 자체에나, 혹은 이 속상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 방편인 믿음에나, 실제적인 공효(功效)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분은 성부께서 사람들과 새롭게 상대하시거나 혹은 원하시는 새로운 조건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나 온전한 뜻을 얻으셨다. 하지만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일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아무도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사람이 충족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반박: 이러한 오류를 가르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멸시하는 자이며, 그 죽으심의 가장 중요한 열매 혹은 유익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지옥에서 다시 꺼내 오는 자입니다.

4
오류: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중보로 삼아 사람과 맺으신 은혜의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요구를 폐하시고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우리의 믿음 자체와 믿음의 순종을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여겨 주셨다는 데에 있다. 은혜롭게도 그것을 영생의 상을 주시는 데에 합당하게 여겨 주셨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성경과 상충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 따라서 그러한 오류를 가르치는 자는 불경건한 소시누스(Socinus)처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교리를 전혀 새롭고 이상한 방식으로 선포하는 것이며, 만대의 교회가 한목소리로 고백하는 내용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5
오류: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목한 상태와 언약의 은혜에 받아들여졌으며, 따라서 아무도 원죄 때문에 정죄를 받을 처지에 있지 않고 그런 일은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원죄의 죄책에서 해방되었다.

반박: 그러한 견해는 성경과 상충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가르칩니다(엡 2:3).

6
오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으신 유익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베풀고자 하셨지만, 실상을 보면 어떤 사람은 사죄와 영생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이 생기는 것은 차별 없이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려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기는 것이지, 어떤 이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 은혜를 자신들에게 적용하도록 강력하게 역사하는 특별한 자비의 선물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박: 그러한 주장을 가르치는 자는 구원의 획득과 구원의 적용 사이의 구분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분별력이 부족하고 미숙한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건전한 의미에서 그 차이점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의 생각에 펠라기우스의 치명적인 독소를 주입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7
오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고 영생을 위해 택하신 사람들을 위하여 돌아가실 수도 없었고, 그러실 필요도 없었으며, 실제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사도의 교훈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또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셋째와 넷째 교리: 인간의 타락,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과 그 일이 일어나는 방식에 관하여

제1조. 타락이 사람의 본성에 끼친 영향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의 지성은 자신의 창조주와 모든 신령한 것들에 관한 참되고 온전한 지식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의지와 마음은 올바르고 그의 정서는 모두 순수하였고, 따라서 사람은 온전히 거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반역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그렇게 뛰어난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대신에 다음과 같은 결과들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곧 자신의 지성은 눈멀고 끔찍한 암흑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또한 공허하게 되고 판단이 왜곡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의지와 마음에는 악의와 반역과 완고함이 생겨났으며, 그의 모든 정서는 불순하여졌습니다.

제2조. 부패의 확산
타락 이후로 사람이 그렇게 부패하였고 그러한 자녀를 낳았습니다. 부패한 아버지로서 부패한 자녀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 부패는 이렇게 아담에서부터 그의 후손 모두에게 확산하였는데, 오직 한 분 그리스도는 예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을 제외하고 이 부패는 아담에서부터 그의 후손 모두에게로 절리 전파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처럼 모방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따르면, 그릇된 본성이 유전됨으로써 일어난 것입니다.

제3조.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 죄악 가운데서 잉태되고 진노의 자녀로 태어나서 구원을 얻게 할 만한 어떤 선행도 할 수 없고, 오히려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고 죄 가운데서 죽어 있으며 죄의 종입니다.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성신의 은혜가 없이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거나, 자기의 부패한 본성을 고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교정할 의지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제4조. 본성의 빛으로는 불충분함
그러나 타락 이후에도 사람 안에는 본성의 빛이 확실히 조금은 남아 있어서 하나님과 본성적인 것들과 또 영광과 수치(羞恥)의 차이점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유덕하고 단정하게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본성의 빛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없으며, 사람은 본성적이고 시민적인 일에서조차도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빛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빛을 완전히 오염시키고 있으며, 불의로 그 빛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제5조. 율법으로도 불충분함
본성의 빛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또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특별히 유대인에게 주신 십계명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죄의 중함을 드러내고 사람에게 자신의 죄책을 더욱더 깨닫게 하지만, 교정책을 제시하거나 그 비참함에서 벗어날 힘을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율법은 그 율법을 범한 사람을 저주 아래에 둡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서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제6조. 복음의 필요성
따라서 본성의 빛이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곧 화목의 사역을 통하여 성신의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메시아의 복음이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똑같이,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제7조.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전파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파되지 않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의 이러한 비밀을 구약 시대에는 소수에게만 계시하셨으나, 신약 시대에는 민족들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시고 더 많은 사람에게 그것을 계시하셨습니다. 복음을 이렇게 전파하신 이유는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본성의 빛을 더 잘 사용하였기 때문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기쁨과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래 우리가 받아 마땅하였던 처분 대신에 과분하리만큼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과 관련하여서는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하고 의로우심을 찬송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호기심으로 파고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제8조. 복음으로 진지하게 부르심
그러나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가장 기뻐하시는 일, 곧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야 할 것을 그분의 말씀에서 진지하고 신실하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나아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원한 생명을 진지하게 약속하십니다.

제9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오지 않는 이유
복음의 사역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많지만, 어떤 사람이 나아오지 않고 회심하지 않는 것은, 복음에 결함이 있거나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께 부족이 있거나, 복음으로써 그들을 부르시고 심지어 그들에게지 주시는 하나님께 과오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잘못은 바로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긴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따라서 일시적 신앙의 기쁨이 사라져 버리면 그들도 돌아섭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염려와 즐거움이라는 가시나무로 말씀의 씨를 질식시키고, 따라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13장).

제10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오는 이유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사역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을 때에 실제로 와서 회심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의 원인을 사람에게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교만한 펠라기우스 이단이 주장하듯이, 다른 사람도 믿음이나 회심을 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똑같이 받았으나 그가 그 사람들보다 자유의지를 더 잘 사용하여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고, 시간 안에서 그들을 효력 있게 부르시고,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시며, 그들을 어둠의 나라에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국적을 옮기십니다. 이 일은, 사도가 여러 곳에서 증언하는 대로, 그들이 자기들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그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제11조. 하나님께서는 회심을 어떻게 일으키시는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그분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시행하시며 그들 안에 참된 회심을 일으키시는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게 하시며 성신으로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비추어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신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도록 하십니다. 또한 회심케 하시는 동일한 성신의 효력 있는 사역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셔서 닫힌 마음을 여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 받지 않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고 그의 의지에 새로운 자질들을 주입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죽은 의지를 살아나게 하시며 나쁜 의지를 선하게 하시고, 거역하던 의지를 기꺼이 행하려는 의지로, 완고하던 의지를 순종하는 의지로 만드십니다. 그분께서 의지를 감동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기 때문에, 마치 좋은 나무가 그러하듯이 사람의 의지도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제12조.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
이러한 회심을 성경에서는 중생, 신생, 새로운 창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 다시 살게 하심 등과 같은 말로써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하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도움 없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생은 강설(講說)이나 도덕적인 권면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맡은 역할을 행하시고 나면 이제 중생이나 회심의 여부가 사람의 권한에 남겨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중생은 분명히 초자연적이고 지극히 강력하며, 동시에 지극히 즐겁고 놀랍고 신비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중생의 일을 행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영감(靈感)으로 기록하신 성경에 의하면, 중생은 그 능력의 면에서 창조의 일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시는 일보다 못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그 마음에 역사하시는 사람들은 모두 분명히, 실패함이 없이, 효력 있게 중생을 하며, 정말로 믿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새로워진 의지는 하나님에 의하여 활성화하고 작동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활성화한 터에서 이제는 그 의지가 직접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이 스스로 믿고 회개한다’ 하고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제13조. 중생은 파악할 수 없는 것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는 방식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구주를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는 일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14조.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방식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사람의 자유의지에 제공하신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에게 부여하시고 그 사람 안에 주입시켜 스며들게 하신다는 점에서 선물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만을 주신 후 사람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믿기로 동의하거나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기를 기다리신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곧 소원을 품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며 참으로 만물 가운데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행위 두 가지를 모두 일으키신다는 의미에서 선물입니다.

제15조. 무가치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태도
이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진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에게 빚지실 수 있습니까? 주님께 먼저 무엇을 드려서 주님의 갚으심을 받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가진 것이라고는 죄와 거짓밖에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빚을 지실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빚을 지고 그분께만 영원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지 않는 사람은 그러한 영적인 것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저 자신의 삶에 만족하거나, 혹은 그러한 무관심 가운데서 자기가 아직 갖지 않은 것을 헛되이 자랑합니다. 또한 자기의 신앙을 외적으로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사람에 관하여는, 우리도 사도들의 본을 따라서 가장 호의적인 태도로 판단하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곧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에게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스스로 그들에게서 구별된 자들인 것처럼 그들을 대하여 교만하게 행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제16조. 사람의 의지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것
사람이 타락하였어도 여전히 사람으로 존재하고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부여받은 자이며, 또한 모든 인류에 퍼진 죄악이 사람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빼앗아 가지는 않았으나, 죄는 사람에게 부패와 영적인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이 은혜도, 나무토막이나 돌들을 대하는 것처럼 작용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와 그 특성들을 제거하거나 힘으로 눌러 강요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사람의 의지를 영적으로 다시 살리고, 치유하고 교정하며, 즐거이 그러나 강력하게 변화시킵니다. 그 결과 전에는 육신의 반항과 저항이 전적으로 지배하던 곳에 이제는 성신으로 말미암아 신속하고도 신실한 순종이 우세하여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의지가 성신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새롭게 되고 자유롭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선의 조성자이시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그러한 방식으로 대하시지 않았다면, 원 창조 상태에서조차 사람을 스스로 파멸에 빠지게 만든 그 자유의지를 통하여서는 자신의 타락에서부터 다시 일어날 소망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제17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적인 삶을 조성하시고 유지하시는 그 전능하신 사역에서도 수단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요구하시며, 그 수단을 사용하여서 자기의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을 따라 그 능하신 행사를 나타내기로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초자연적인 사역에서도 복음의 사용을 결코 배제하거나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지극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중생의 씨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교사들은 하나님의 이 은혜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가르침으로써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모든 교만을 버리게 하였으며, 동시에 그들이 계속하여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시행을 잘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복음으로 거룩하게 권면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긴밀히 짝지어 놓으신 것을 떼어 놓음으로써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교육과 훈계를 통하여 주어지며, 우리가 자기의 의무를 더 신속히 수행하면 할수록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 은혜가 더 찬란히 빛나고, 그분의 사역이 더 번성하여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정하신 이러한 수단과 또 이 수단이 구원의 열매를 효력 있게 맺는 일을 인하여서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돌립니다. 아멘.

오류들을 배격함

지금까지 사람의 부패 및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에 관하여 참된 교리를 설명하였으므로, 대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배격합니다.

1
오류: 정당하게 말하자면, 원죄 자체로는 모든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하다거나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형벌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사도의 다음과 같은 선언들과 충돌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롬 5:16).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2
오류: 선이나 거룩함, 의와 같은 좋은 자질 혹은 덕목이나 신령한 은사는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에도 그의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타락하였다고 해서 사람의 의지에서 분리될 수 있는 것들도 아니었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에베소서 4:24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긋납니다. 거기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의와 거룩함에 연결지어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분명히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3
오류: 사람이 영적으로 죽게 되었을 때에도 그 영적인 은사들은 사람의 의지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의지라는 것 자체가 부패하는 일이 없고 다만 마음의 암매와 무절제한 정욕으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애들을 제거한다면 의지는 그 내적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의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 그가 원하는 온갖 선을 택할 수도 있고 혹은 원치 않아서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사람이 고안해 낸 오류로서, 사람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높게 여기는 것이고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됩니다. 이를테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하였습니다(렘 17:9). 또한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2:3에서 “우리도 다 그(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엡 2:3)라고 기록합니다.

4
오류: 중생하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죄 가운데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또한 영적인 선을 행할 능력을 모두 빼앗긴 것도 아니다. 그는 의와 생명을 여전히 굶주리고 목말라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제사를 드릴 수도 있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증언하는 것과 충돌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엡 2:1). “허물로 죽은 우리를……”(엡 2:5).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그뿐만 아니라 비참함으로부터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하여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나 상한 심령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오직 중생하여 복 있는 자라고 일컫는 사람들만이 하는 일입니다(시 51:17; 마 5:6).

5
오류: 타락한 자연인도 일반은총(항론파들이 본성의 빛을 일컫는 말) 혹은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은사들을 잘 사용할 수 있고, 그것들을 바르게 사용하면 점차적으로 더욱 큰 것, 곧 복음에서 말하는 구속의 은혜와 구원 그 자체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얼마든지 기꺼이 계시하려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필요한 수단, 혹은 믿음과 회개에 필요한 수단을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고 효력 있게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반박: 그러한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만대의 경험에서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증언하는 것입니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 147:19-20).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성신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6
오류: 사람이 참되게 회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의지에 새로운 자질이나 능력이나 선물을 주입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 곧 우리가 처음 회심하는 수단이자 우리가 신자라 불리는 근거인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입하시는 자질이나 선물이 아니며 다만 사람의 행위일 뿐이다. 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과 관련하여서만 선물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반박: 그러한 교훈은 성경과 충돌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자질들, 곧 믿음과 순종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식 등을 우리의 마음에 주입하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사 44: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또한 이런 주장은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하고 간구한 선지자의 기도처럼 교회가 끊임없이 드려온 그 기도와도 충돌합니다.

7
오류: 우리를 하나님께 회심시키는 그 은혜는 다만 선의의 권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권고의 방식은 사람을 회심시킬 때에 가장 고상한 방식이고 사람의 본성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다. 이렇게 권고하시는 은혜만으로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되는 데에 충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도덕적 설득 이외의 방식으로 사람의 의지가 찬동하게 하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사역이 사탄의 사역보다 그 능력이 뛰어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선을 약속하시는 반면에 사탄은 단지 현세적인 선만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반박: 이것은 완전히 펠라기우스의 주장이고 성경 전체의 교훈과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회심에 관하여 말할 때에 그러한 도덕적 설득을 넘어서는 것, 곧 성신의 매우 강력하고 신적(神的)인 사역을 가르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8
오류: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분의 전능한 능력으로 사람의 의지를 강권하여 확실하게 굴복시키지는 않으신다. 비록 사람을 회심케 하는 그분의 은혜의 사역이 이미 모두 성취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생을 계획하시고 의도하실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성신께 저항할 수 있고, 실제로 저항하여서 자기의 중생을 완전히 막아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따라서 중생하거나 중생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

반박: 그러한 주장은 우리를 회심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효력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사람의 의지에 복속시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과 충돌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엡 1:19). “우리 하나님이……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9
오류: 은혜와 자유의지는 회심이 처음 시작되도록 함께 작용하는 요인들이다. 그리고 그 순서에서 은혜는 의지의 작용에 앞서지 않는다. 사람의 의지가 스스로 움직여서 결정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지가 회심에 이르도록 효과적으로 돕지 않으신다.

반박: 고대 교회는 오래전에 그러한 펠라기우스의 교훈을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씀을 따라서 정죄하였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다섯째 교리, 성도의 견

제1조. 중생한 사람이라도 자기 안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함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따라서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부르시고 그분의 성신으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을, 죄의 지배와 노예의 상태에서 확실하게 해방시키십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들을 육신과 죄의 몸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제2조. 중생한 사람이라도 연약함으로 인해 날마다 죄를 지음
그러므로 연약함으로 인하여 날마다 죄를 짓는 일이 생기고, 성도가 행하는 최고의 행위라 해도 거기에는 결점들이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겸비케 하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로 피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들은 기도의 성신을 통하여서, 그리고 거룩하게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점점 더 육신을 죽여야 하며, 마지막에 이르러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어린양과 함께 왕 노릇할 때까지, 완전의 목표를 갈망하며 추구하여야 합니다.

제3조.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보존하심
이렇게 신자들 안에 거하는 죄가 아직 남아 있고 또 세상과 사탄이 시험하기 때문에, 이미 회심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들의 힘에만 맡겨 두면 은혜의 상태에서 견인(堅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그들에게 전에 내려주신 은혜를 자비롭게 확증하여 주시고 또한 강력하게 붙드셔서 끝까지 그 은혜의 상태 안에 그들을 보존하십니다.

제4조. 성도들도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음
참된 신자를 은혜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지극히 강력하므로 육신이 그 은혜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회심한 사람이라도 어떤 특정한 행동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은혜의 인도에서 벗어나거나 육신의 정욕에 유혹되어 넘어가는 일들이 전혀 생길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인도와 감동케 하심을 항상 받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을 때에 그들은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이끌려서 심각하고 악명 높은 죄에 빠질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허용 가운데 이따금 실제로 그러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과 베드로와 그 밖의 성도들의 통탄할 만한 타락의 사건들이 그러한 사실을 잘 나타냅니다.

제5조. 그러한 심각한 죄의 결과들
그렇지만 그처럼 큰 죄들을 범함으로써 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촉발하고, 죽음의 죄책을 짊어지게 되며, 성신을 근심시키고, 잠시 동안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게 되며, 자기 양심에 큰 상처를 입히고, 종종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맛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신실하게 회개하여 바른길로 돌아서고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같은 얼굴을 그들에게 다시 비추어 주실 때까지, 그들은 그러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제6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잃어버리지 않으심
자비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택하심의 변치 않는 목적을 따라서, 혹시 그분의 백성이 크게 타락한 경우에도 그들에게서 그분의 성신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양자 삼으심의 은혜나 의롭다 하심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갈 정도까지, 혹은 사망에 이르는 죄나 성신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받고 영원한 파멸에 떨어질 정도까지, 그렇게 깊이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제7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심
왜냐하면, 그들이 타락할 때에도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중생시킨 그분의 불멸의 씨를 그들 안에 보존하셔서, 그 씨가 소멸하거나 제거되지 않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성신으로 확실하고 효력이 있게 그들을 새롭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범한 죄를 마음으로 경건하게 슬퍼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을 통하여 중보자의 보혈로 사죄함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경험하며, 그분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좀 더 근실하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제8조. 이렇게 보존하시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은혜
따라서 성도들이 믿음과 은혜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고 행여 실족하더라도 보존이 되며 완전히 잃어버림이 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나 힘 때문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만을 놓고 보면, 믿음과 은혜에서 완전히 떠나는 일은 쉽게 일어날 뿐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작정은 변경될 수 없고, 그분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으며, 그분이 목적하시고 부르신 것은 취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와 보존하심은 무효가 될 수 없고, 성신의 인 치심이 뜻을 이루지 못하거나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9조. 이렇게 보존하시는 것을 확신함
신자들은 택하신 자들이 이렇게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되며 참된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하게 될 것을 참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참되고 살아있는 지체이며 항상 그렇다는 것과, 또 자신들이 죄 사함과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각기 실제적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제10조. 이 확신의 근원
이러한 확신은 어떤 특별한 사적 계시가 말씀에 더하여지거나 혹은 말씀과 상관없이 주어짐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를 위하여 그분의 말씀에 매우 풍성하게 계시하여 두신 약속을 믿는 데서 생겨나고, 성신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임을 증언하시는 것에서 생겨나며, 끝으로 성도가 깨끗한 양심과 선한 일을 거룩하고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에서 그러한 확신이 생겨납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이 승리에 대한 굳은 위로와 영원한 영광에 대한 이 확실한 보증을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11조. 이 확신은 항상 느끼는 것이 아님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육신의 여러 가지 의심과 싸워야 하고, 극심한 시험 가운데서도 이렇게 완전한 믿음의 확신과 견인(堅忍)의 확실성을 항상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도록 허락지 않으시고 또한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시며, 성신으로써 그들 안에서 견인의 확신이 다시 회복되게 하십니다.

제12조. 이 확신은 경건을 장려함
그러나 견인의 그러한 확실성은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자만하여 안주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겸손함과 어린아이 같은 공경심, 참된 경건함과 삶의 온갖 씨름 가운데서 인내하는 것, 간절한 기도, 한결같이 십자가를 지고 진리를 고백하여 나아가는 일,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누리는 기쁨의 진정한 근원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유익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감사한 마음으로 착한 일을 더욱 진지하고도 지속적으로 행하도록 격려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증언과 성도들의 모범을 볼 때에 분명합니다.

제13조. 이 확신은 부주의한 삶으로 이끌지 않음
타락 이후에 회복된 사람들에게는 이 견인의 확신도 회복되는데, 이러한 확신은 결코 부주의하거나 경건을 게을리 하는 삶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확신으로 인해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그 길을 찾는 데에 훨씬 더 큰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그들은 견인의 확신을 계속 굳게 붙들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그들에게서 다시 돌리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아버지와도 같은 선하심을 남용하면 그분은 그 얼굴을 가리실 것이고, 그 결과로 그들은 훨씬 더 큰 영혼의 고통에 떨어질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생명보다 더 달콤하지만 그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죽음보다 더 씁니다.

제14조. 견인의 일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하심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강설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이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기를 기뻐하셨듯이, 마찬가지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과 묵상하는 것, 그리고 말씀의 권면과 위협과 약속들. 또한 성례의 시행 등을 통하여 그 사역을 보존하고 계속되게 하며 완성하십니다.

제15조. 사탄에게서는 증오를, 교회에서는 사랑을 받는 이 교리
참된 신자와 성도가 견인하고 또한 확신한다는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의 영광과 경건한 사람의 위로를 위하여 그분의 말씀에 매우 풍성하게 계시하셨고, 또한 신자의 마음에 그것을 새겨 주십니다. 이 교훈을 육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사탄은 증오하며, 세상은 조롱하고, 무지한 자들과 위선자들은 그릇되게 사용하며, 이단들은 공격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 교훈을 마치 무한한 가치가 있는 보물처럼 지극히 귀중히 여겨 깊이 사랑하고 늘 옹호하여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모략도 무용지물로 만드시고 어떠한 권세도 맞서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교회가 계속하여 그렇게 전진해 가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만, 오직 한 분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존귀와 영광을 영원히 돌립니다. 아멘.

오류들을 배격함

지금까지 성도의 견인에 대한 참된 교리를 설명하였으므로, 이제 대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배격합니다.

1
오류: 참된 신자의 견인은 선택의 열매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하나님의 선물도 아니며, 새 언약의 조건이다. 사람은 소위 확정적인 선택이나 칭의 이전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반박: 성경에서는 성도의 견인이 선택에서부터 나오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중보 사역으로 인해 그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7).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2-35).

2
오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자들이 끝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베풀어 주시며, 사람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려고만 한다면 기꺼이 그 힘을 그 사람 안에 계속 보존하여 주신다. 그러나 믿음의 견인(堅忍)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어도, 또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여서 믿음을 보존하려 하신다 하더라도, 그의 견인이 이루어질지의 여부는 여전히 언제나 사람이 내리는 의지의 결단에 달려 있다.

반박: 이러한 생각은 철저히 펠라기우스주의적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만, 실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복음의 일관된 교훈과 충돌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가르쳐 주고, 복음의 유익에 대한 찬사를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만 돌리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증언과도 상충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3
오류: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이라도 의롭게 하는 믿음과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완전하고 확정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거기에서 떨어져 나가서 영원한 멸망을 받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반박: 그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칭의와 중생과 지속적인 보존의 은혜를 무효화하는 것이고, 바울 사도가 다음과 같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과도 모순이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또한 사도 요한의 다음의 말과도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4
오류: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이라도 사망에 이르는 죄 혹은 성신을 거스르는 죄를 범할 수 있다.

반박: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16-17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금한 후에, 즉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5
오류: 어떤 특별한 계시가 따로 주어지지 않는 한, 신자는 자신이 장래에도 끝까지 믿음의 인내를 나타낼 것이라는 확신을 이생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다.

반박: 그러한 교훈은 진실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참된 위로를 빼앗는 것이고, 교황주의자들의 의심이 교회 안에 다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견인의 확신을 어떤 특별하고 특이한 계시에서부터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특징적인 표지들과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들에서 항상 끌어냅니다. 따라서 특별히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또한 요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하고 기록합니다.

6
오류: 신자의 견인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는 그 자체의 성격상 거짓된 안정감을 갖게 하고, 경건과 선한 행실과 기도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실천하는 데에 해가 된다. 반대로 견인을 의심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반박: 그러한 오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신의 사역을 무시하는 것이고,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한 말로 가르친 것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게다가 그러한 주장은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이 보였던 본을 통하여서도 반박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인과 구원을 확신하면서도, 계속하여 기도와 여러 경건한 생활들을 영위해 갔습니다.

7
오류: 잠시 동안만 믿은 사람의 믿음도 의롭다 함과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과 다르지 않고, 단지 그 기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반박: 마태복음 13:20-23과 누가복음 8:13-15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잠시 동안 믿은 자와 참신자 사이에 그 기간의 차이 외에도 세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잠시 믿는 자는 말씀의 씨를 돌밭에서 받고, 뿌리가 없으며, 열매가 없습니다. 반면 참된 신자는 좋은 땅 곧 착한 마음으로 말씀의 씨를 받고, 뿌리를 굳게 내리며, 끊임없이 항상 많은 열매를 다양하게 맺습니다.

8
오류: 첫 번째 중생을 상실하고 나서 다시 중생한다거나, 혹은 여러 번 새로 중생한다는 말은 불합리하지 않다.

반박: 이러한 주장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씨가 썩지 않는 것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9
오류: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지속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 일이 나오지 않는다.

반박: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너를(베드로)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 하고 말씀하신 것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단언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하여서 믿을 자들을 위하여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던 사실과도 전혀 맞지 않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11, 15, 20).

이 번역은 독립개신교회신학교 교장 김헌수 목사의 번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