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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1월 28일어떻게 경건한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 제자도의 기초”의 열 두 번째 글입니다.
최근에 구입한 가구에는 조립에 필요한 안내 설명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사진과 함께 꼼꼼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들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런 실수들 때문에, 육각 렌치를 든 많은 사람들이 이 조립식 가구를 제대로 맞추는 길에서 자주 엇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내게 큰 도움이 된 것도 바로 그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쓸데없이 애를 태우며 좌절하는 일을 한참 덜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아버지들을 위한 지침을 주시고, 우리를 마음을 무너뜨리는 함정에서 건져 내신다. 그런 함정은 우리 자신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
성경에는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교훈이 가득하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4절에 기록한 이중적 명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성경은 교훈과 더불어, 아버지의 역할에 관한 긍정적인 본보기와 부정적인 본보기를 풍성히 제시한다. 부정적인 본보기들, 특히 경건한 사람들의 자녀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거나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는 기록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수많은 실례들을 보면, 아버지가 주목해야 할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만연한 악한 죄를 제때 다루었더라면, 다른 결말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이런 구약의 이야기들은 단지 부모만을 교육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지만, 동시에 부모를 가르치기에도 충분히 가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동시에, 자녀(그리고 우리 자신)를 경건으로 이끄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자녀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는 자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적극적으로 인도할 수 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가 이미 범한 죄뿐 아니라 미리 막을 수 있는 더 큰 죄와 그 결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제 창세기에서 몇 장면을 살펴보자.
아담: 가인의 분노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가 인류 최초의 가정에서 영향력을 드러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들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소개되기가 무섭게, 우리는 가정 내의 갈등을 목도하게 된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은 받지 않고 동생의 제물만 받으신 일에 분노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인을 찾아가 말씀하셨으나(창 4:6 참고), 그의 분노를 돌이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그 분노는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인은 남은 생애를 도망하며 유리하는 자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가인의 그런 성정과 분노를 미리 바로잡을 수 있었던 조짐은 없었을까? 아담은 중재했는가, 아니면 하와가 뱀에게 속았을 때처럼 가만히 앉아 방관했는가?
이삭: 에서의 성급함과 야곱의 기만적인 성향
성경은 털이 많은 에서가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창 25:27)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사냥한 짐승들만큼이나 충동적인 인물인 듯하다. 그가 들에서 돌아와 심히 피곤했다 하더라도, 죽 한 그릇에 동생에게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지혜로운 결정이 아니다(창 25:30–34 참고). 에서는 야곱이 내건 조건에 동의하기 전에 그 결정이 초래할 결과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러 해가 지난 후,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창 28:6)라고 명했는데도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가진 반감과 동생에게 속았던 아픔 때문에 그가 그렇게 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 아내와 함께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벗어나 사는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의 잘못된 결정들이 초래할 결과를 깨닫도록 더 일찍 그를 설득했더라면, 훗날의 결과가 그와 같았을까?
야곱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려고 염소 가죽을 붙이고 형의 옷을 입었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야곱이 형을 구슬려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을 때, 이미 그의 기만적인 성향을 보여 주는 징후가 있지 않았는가? 부모가 지어 준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발꿈치를 잡은 자’와 ‘속이는 자’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데, 그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의 쌍둥이 형 에서는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외친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창 27:36). 이 이야기에는 더 큰 역설이 담겨 있다. 과거에 이삭이 아비멜렉을 속이고 거짓말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도 속임과 거짓말을 당했다는 점이다(창 26:7 참고). 이삭이 자신의 기만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더라면, 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었을까?
야곱: 디나의 불만족과 요셉의 교만
성경에 유일하게 이름이 기록된 야곱의 딸은 디나이다. 창세기는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창 34:1)라고 말한다. 그 땅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의 도시인 세겜이다. 디나는 왜 자기 집을 떠나 이웃 도시의 여자들에게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을까? 세겜에서 그녀는 한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끔찍하게 유린당하는 사건을 통해, 그 땅이 참으로 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곱이 자기 삶에 너무 몰두하느라 딸의 방황하는 눈길을 놓친 탓에, 결국 그녀가 멀리 벗어나 그런 비극을 겪게 된 것은 아닐까?
어린 요셉은 자신이 높아지고 형들이 자기 발 앞에 절하는 내용의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 이 꿈들은 형들이 요셉에게 더욱 분노하도록 부추겼다. 그렇다면 형들은 그 꿈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요셉이 형들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니면 야곱에게서 편애를 받은 까닭에 생겼을지도 모르는 요셉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을까?(창 37:3 참고) 야곱은 부모 및 형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일을 통해, 그런 편애가 가져오는 결과를 배우지 않았는가?
아버지들을 향한 부르심
시간이 허락된다면, 범위를 넓혀 마노아와 삼손, 엘리와 그의 아들들,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 또는 다윗과 압살롬까지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적은 아버지들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만약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아버지들과 자녀들의 죄악된 상황을 자신의 구속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 모든 행위를 초월하는 주권자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그 결과가 완화되지는 않으며, 우리 가정이 겪는 죄의 비참한 결과 역시 가벼워지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많은 죄가 있겠지만, 이 모든 죄는 단지 과거의 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자녀에게도(그리고 종종 아버지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자녀에게서 그와 비슷한 죄의 성향을 볼 때, 아버지는 그저 아무런 해가 없기만을 바라면서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앞서 살펴본 이야기들은 그런 기대가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보여 준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로 자녀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야 하며,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용서와 회개를 통해 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아버지로서 우리는 믿음의 여정에서 자녀를 위한 목자요 인도자가 되라고 부름받았다. 이사야는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그와 같은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아버지와 자녀 관계 중에서도 단 하나의 관계, 결코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실패하지도 않을 완전한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의 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우는 데 그치지 말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완성된 일 가운데 언제나 안식을 누리자. 바로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자신이 더욱 경건해지고 자신의 가정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와 긍휼과 힘이 흘러나온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