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역적 소진 상태에 대처하는 법
2026년 02월 20일
바벨의 성읍과 탑
2026년 02월 24일자녀를 잃은 슬픔에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기독교인들이 흔히 겪는 고민들”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천국에 이르기 전 이 땅에서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건강과 부와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 모두는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경험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건강이나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인간관계가 깨지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소중한 사람을 잃는 일이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상실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그 상실감이 우리를 압도해, 다른 모든 것, 심지어 생명을 주는 성경의 진리마저 슬픔 속에 매몰되어 버릴 수도 있다.
내 딸 레일라가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사산되었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경험했다. 나는 내가 겪은 참혹한 상실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를 먹일 수도, 입히고 돌볼 수도 없게 되었다. 내 아들 벤은 여전히 외동으로 남게 되었고, 나는 다시 불임의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내 딸은 무덤에 묻혔다. 이렇게 내 영혼은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끔찍한 현실만 하나하나 주시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상실한 것과 겹겹이 쌓인 그 아픔을 들여다보느라, 내 슬픔을 위로하고 내 어둠에 빛을 비추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서 눈을 떼고 말았다. 찬송시를 쓰는 헬렌 렘멜(Helen Lemmel)은 절망의 벼랑에 매달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었다.
눈을 들어 주 예수님을 바라보라.
놀라운 주님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보라.
그분의 영광과 은혜의 빛 안에서,
이 세상 것들은 이상하리만치 빛을 잃고 희미해지리니.
내가 예수님께로 눈을 돌리자 그분의 빛이 어둠을 비추었고, 아이를 잃은 나의 상실감이 이상하리만치 희미해졌다. 주님을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고통 한가운데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위로가 내게 임했다.
돌보시는 구주
딸을 잃은 슬픔 속에서 예수님께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긍휼이 충만하신 구주를 만났다. 복음서는 온갖 상실을 겪고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온유하게 대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예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을 깨끗이 낫게 해 달라고 간구했던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1). 이 남자는 레위기의 규례에 따라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고(레 13장 참고), 그래서 항상 다른 이들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격리된 채, 추방된 자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 단절의 간극을 넘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가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손길을 느껴 본 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이었겠는가?
복음서는 타락한 세상에서 무거운 짐과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만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허다하게 보여 준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눅 7:11–15 참고)와 병든 자들(마 14:14 참고), 굶주린 자들(마 15:32 참고), 맹인들(마 20:30–34 참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자들(마 9:35,36 참고)을 찾아가셨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만나는 우리 구주는 고통받는 자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미시는’ 분이다.
우시는 구주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인 요한복음 11장 35절만큼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선명히 보여 주는 말씀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친구 나사로가 죽어 슬픔에 잠긴 집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연출된 듯 눈물 한 방울을 흘리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셨다. 예수님은 비록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임을 알고 계셨지만, 여전히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셨다.
레일라가 사산된 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내 구주도 우셨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존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의 고통에 대해 그분은 마치 친히 그것을 겪으신 것처럼 깊이 공감하신다.” 당신이 겪는 상실이든 내가 겪는 상실이든,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분은 가슴으로 슬픔을 느끼고, 뺨 위로 눈물을 흘리신다.
정복하시는 구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울기도 하신다는 사실은 상실의 때에 위로가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고통과 슬픔에 빠진 우리 곁에서 함께하신다 한들, 결국 우리를 위해 그것을 이기지 못하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그것을 정복하시지 못한다면, 궁극적으로 위로하는 분도 되시지 못한다. 우리의 상한 마음에 필요한 것은 단지 동정하는 이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 위에 반창고를 붙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고통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러 오셨다. 그분은 타락의 저주를 되돌리기 위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죄가 모든 것 위에 추악한 얼룩을 드리우기 전에는 그 어떤 상실도 없었다. 우는 것도, 실망도, 깨어짐도, 죽음도 없었다. 예수님께서 죽음 가운데 있는 나사로를 생명으로 불러내셨을 때, 그분은 자신이 무엇을 하러 이 땅에 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써, 장차 올 세상에 대한 새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즉, 그곳에서는 모든 슬픔과 탄식이 떠나가고, 더는 죽음과 상실이 없을 것이다.
위로하시는 구주
레일라가 내 태중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나를 집어삼킬 듯한 슬픔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죄와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를 돌보고, 함께 울고, 정복하시는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위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였다. 그분께로 눈을 돌리자, 나의 상실은 ‘그분의 영광과 은혜의 빛 안에서 이상하리만치 빛을 잃고 희미해’졌다.
오 그대의 영혼이여, 지치고 곤고한가?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가?
구주를 바라보라, 거기에 빛이 있나니,
풍성하고도 자유로운 생명이 넘치리라.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