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향하는 신학은?
2022년 01월 10일신학과 일상
2022년 01월 10일신학과 교회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바로 지금이 영원히 중요하다” 의 네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과 진리는 교회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마 16:16)로 고백하며 이 진리를 따르는 이들을 제자로 삼으시며,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셔서 그의 진리에 따르며 그의 길을 걷도록 하신 자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대위임령을 통해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제자를 삼고, 그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제자들은 어떻게 제자 삼는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놀랍도록 간결한 두 가지 요점으로 그 거대한 임무를 요약해 주셨다: 세례 주고 가르침으로써 제자 삼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 언어들이 친숙하지 않다면,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요약을 다소 놀랍게 느낄 것이다. 가르치라는 위임령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게 짧은 요약 속에 세례 주라는 위임령을 포함하는 것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움은 우리를 더 깊은 숙고와 묵상으로 초대한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깊이 묵상해 본다면, 주님의 요약이 얼마나 적절하며, 유용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위임령 속에서 우리는 제자 삼는 사역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고 세우는 것. 제자들이란, 세례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도록 인도 받고, 삶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을 통해 세워진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물 뿌리는 의식과 같은 좁은 의미에서가 아닌, 세례와 결부된 모든 것들에 관한 넓은 의미에서 우리를 세례에 주목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세례 요한의 사역 속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의 세례 사역은 좋은 소식(눅 3:18), 회개에로의 초청(3절) 및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강조(8절)가 담긴 메시지의 선포를 포함한다.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선포하고 그 약속들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요청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세례는 진정으로 제자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시작하도록 요청한다.
“성숙한 교회는 분별과 의 안에서 배우고 훈련 받기 위해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
16세기에 기록되고, 수세기 동안 사용된 화란 개혁파 교회들의 세례 예식서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과 관련된 특징적인 역할과 약속들을 유용하고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예식은 세례 받은 각 사람들 안에서 물 세례가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례가 약속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천명하고 있다. 세례 안에서, 성부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한 은혜의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와 상속자로 입양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세례 안에서, 성자 하나님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씻어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도록 접붙이셔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 받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세례 안에서,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날에 마침내 택하신 자들 가운데서 점도 없이 드러나도록 하실 때까지 우리를 거룩케 하실 것임을” 약속하신다. 세례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약속들은 복음 속에 담긴 소망의 심장과 핵심을 천명한다. 세례는 그저 단순한 외적인 예식이나 교회 혹은 일개 신자의 활동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보이는 말씀”으로서, 우리가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에서 읽듯이, 복음 약속의 선포된 말씀을 표현한다.
이 화란 개혁파 세례 예식서의 배경에는 교회를 위한 세례 신학이 놓여 있다. 그것은 선포된 약속들 안에 담긴 하나님 편에서의 세례가 갖는 의미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헌신에의 요구라는 측면에서 인간 편에서 갖는 의미 또한 보여주고 있다. 헌신에 대한 그 요구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표현된다.
“반면에 모든 언약에는 두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순종을 권고하시고, 또 요구하신다. 즉, 이 성부, 성자, 성령 한 분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고; 그분을 신뢰하며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뜻과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세상을 버리며,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경건한 삶의 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또 우리가 연약하여 때때로 죄 가운데 넘어질 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체념하거나, 죄를 지속해서는 안된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었음을 보여주는 인(seal) 치심이자, 의심할 여지 없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약속의 말씀들을 듣고 믿으며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세례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교회와 연결시킨다. 세례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만 하기 때문에 결코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다. 세례는 교회에 의해 이루어지고 우리를 교회 안으로 이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닌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지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의 교회를 세우고 계시며, 우리는 단지 형식적인 관계로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헌신하여 드림으로써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어야 한다.
세례를 주라는 명령에 덧붙여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세우기 위해 가르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과 그분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위임하신 전적인 권위로 그 가르침의 사역을 지속해 나갔다. 예수의 지상 사역과 그의 사도들 모두를 통해 전해진 그 가르침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취합되고 보존되어 성경에 담겨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살아낼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전해 주시는 그의 신학을 신실하게 가르친다.
그러한 가르침의 사역은 위대한 과업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가 기초적인 진리들이나, 진리들 중의 일부나 혹은 그 진리들 중의 많은 것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시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신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진리에 대한 우선 순위를 매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가르침들 중에 어떤 것도 제거할 권리는 없다. 예수께서는 그의 몸 된 교회가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는 포괄적인 지식으로 이 뜻을 분별하기 원하시며, 그분께 대하여 온전히 헌신된 삶의 자리로 부르신다.
교회들이 그들 스스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들 중에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왜곡하며, 혹은 무시하거나 몇 가지를 더함으로써 그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자유주의적인 교회들은 그들의 지성에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가르침들은 제거한다.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너무나 자주 불신자들에게 오직 단순하거나 간소화된 복음만을 가르침으로써 기독교를 좀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파 교회들은 가르침의 사역에 있어서 포괄적이면서도 성경에 충실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이는 교리와 윤리로 가득한 그들의 신앙고백 표준 문서들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사역자들이나 일반 성도들은 우리에게 분부하신 가르침을 철저히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진정으로 세우는 방식으로 그것을 전달할 수 있을지를 주의 깊게 계획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위한 진리의 저장소이며, 사역자들은 바로 그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들은 성도들을 그저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이나 대중적인 심리학자 같은 존재가 되려는 압박감에 저항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민주주의적인 문화 속에 있는 이들은 또한 매우 중요한 의무가 있다. 그들은 사역자들을 격려하여 하나님의 전체 모략을 가르치도록 해야 하고, 그러한 가르침을 간절히 추구하며 지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심각하게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편지를 썼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접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 3:1-3). 같은 요점이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1-14)
미성숙한 교회들과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육체에 사로잡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둔해져 있다. 성숙한 교회는 분별과 의 안에서 배우고 훈련 받기 위해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진리 안에서 세워진 자들 모두를 포함한 교회는 제자 삼는 사역을 위한 신학이 필요하다. 리고니어는 진리 안에서 제자들을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한 신실한 가르침의 재료들을 제공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제자 삼으라는 예수의 대위임령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완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상황들 속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부르심을 지지해주는 예수의 위대한 약속이 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