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향하는 신학은?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신학, 신학, 신학: 왜 리고니어인가?
2022년 01월 10일
신학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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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향하는 신학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바로 지금이 영원히 중요하다” 의 세번째 글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신념들이 리고니어 사역의 전체 역사를 끌어 왔던 것처럼 <테이블톡> 매거진을 움직인다. 이 신념들 중 하나는 500년 전 마틴 루터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 이외에 또 누가 있을까?

“모든 이들은 신학자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모든 이들이 신학자들이라고 하니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신학이란 무엇인가? 특히, 우리의 신학은 무엇인가?

신학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최고, 최상의 의미로)로서, 일관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뿌리를 두고 표현하는 신학을 의미한다. 우주 전체는 어떤 식으로든 – 역사의 전개, 우리가 발견한 것들 – 모두 창조, 섭리, 구속 및 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펼쳐 놓은 부분이자 선물 꾸러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것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관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언급했듯이, 우주에서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적인 것은 없다. 더 높은 권위를 인용하자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핵 물리학자든, 천문학자나든, 문학 애호가든, 정원사든, 잡동사니 수집가든 혹은 심지어 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 모두가 신학자들이다”(omnes sumus theologi)인 이유이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소명 가운데서 우리 인생의 특권, 도전, 로맨스이다. 궁극적으로,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일을 하고 있다(빌 3:13). 바울이 한 가지 일만 한 적이 있었던가?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도 하다. 천 가지의 다른 활동들 속에서 오직 한 가지 일만 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모든 일들에 있어서 우리는 신학자들이다. 

그러나 신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마도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즐겨보는 BBC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수리점 (The Repair Shop)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억압적이거나 부도덕 한 것 혹은 둘 다인 그 많은 TV 프로그램들 중에서 그 프로는 유일하게 기분 좋은 쇼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상되고, 썩고, 왜곡되고, 거의 망가진 가재들을 수리점에 가져온다. 그들은 종종 (그 자체로는 거의 가치가 없을 수도 있는) 그 물품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관성 때문에 왜 그들에게 중요한지에 대한 심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한다. 시청자들은 목공이나 금속 가공, 기계 조작, 가구, 악기, 기계 장치, 부드럽고 딱딱한 물건들에 숙련된 전문가들의 마술처럼 보이는 특별한 솜씨를 지켜본다. 나 같은 사람들은 대충 임시로 수리해 놓고서 최고의 것을 바라지만, 그들은 처음에 물품들을 분해한 다음 재조립하여 그 귀한 물품이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영광을 복원시킨다. 그리고 나면 아름다운 대단원의 순간을 맞이한다: 시청자들은 여러 주인들의 압도적인 감사와 찬사 및 종종 복원된 물품이 최종적인 영광 속에서 베일이 벗겨질 때 (대게 매우 평범한 담요로부터 등장하는데, 이는 더 위대한 회복을 암시하는 놀라운 방법 아닌가!) 주인들이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순간의 기쁨을 함께 목도하며 그것을 공유한다.        

우리의 신학은 자신에 대하여, 자신 안에서 충족하시고 그의 모든 자기 현시에 있어서 거룩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이다

신학은 복음 수리점이다. 신학의 다양한 “장소” 혹은 주제들 (하나님, 창조, 타락, 섭리, 구속, 영화)은 말하자면, 처음에 우리의 개인적인 상처를 분해하고, 우리를 창조하실 때의 본래적인 비전이 실현될 때까지 재조립하시는 다양한 전문가들의 분야들과 같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선조들이 순례의 신학 (theology of pilgrimage)이라고 불렀던 것이 (우리는 지금 그 안에서 희미한 거울로 보는 것처럼 본다) 마침내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비전의 신학이 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마침내 그분처럼 빚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학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다고 전해져 오는 말이있다.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가르치고,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한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에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다; 요 17:3; 참고 14:23, 25), 우리의 신학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끝난다). 신학은 우리에게 하나님 – 삼위이신 하나님, 영원히 찬송 받으실 삼위일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위격이 영원한 사귐 가운데 거하시는 – 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준다. 그러한 신학은 우리의 제한된 역량으로 소위 그분의 속성들이라고 부르는 양상들을 그럭저럭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분의 놀라운 일치됨, 단일한 성품을 알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한 속성들은 실상 그분의 완전성, 그분의 하나님되심, 그분의 무한 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신성을 묘사하는 많은 방법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은 자신에 대하여, 자신 안에서 충족하시고 그의 모든 자기 현시에 있어서 거룩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이 거룩함이라는 선지자와 사랑이라는 사도의 쌍둥이 비전들에 의해 인도된다 (이사야 6장, 계시록 4-5장) 는 것은 당연하다. 놀라운 사실은, 이 두 개의 비전들 속에 우리의 신학 전체가 요약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비전들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오실”(계 4:8)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창조의 이야기(계 4:11)를 반영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창조자”(니케아 신조), 그의 말씀이신 영원하신 아들을 통해, 태고의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성령의 명령하심, 채우심, 완전케 하시는 사역으로 창조되었다.

그 비전들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을 제공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 배후에 놓여 있으나 거의 인식할 수 없었던 우리의 창조된 운명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을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즉, 그분과 교제하며 송영을 드리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 거룩하신 분 – 를 발견하고 압도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집안 가보인 스코틀랜드의 옛 성처럼, 사탄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자가 회복이 불가능한, 몰락하여 더러워진 유기선이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을 두루마리를 펴서 볼 수 없다(계 5:4).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이렇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되돌리기 원하신다. 진심으로, 우리에게 회복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파멸된 존재들인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 이사야-요한 신학은 우리에게 그것이 결코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이시며 삼중으로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자는 먼저 불태웠다가 회복시키는 제단 숯불을 통해 회복을 가져온다. 이러한 성경의 문학적 기교를 통해 주어진 신학은 이사야가 자신의 비전을 통해 주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요 12:41). 우리의 신학은 계시가 점진적이며 누적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의 비전이 가리키는 인물이 다름 아닌 유다 지파의 사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해석한다(계 5:6-10).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엡 4:20) 점점 더 깊이 파고들수록, 우리는 한 인격 안에 연합된 그분의 두 본성 속에서, 비하와 승귀의 두 상태 속에서 그리고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그분의 삼중 직분 속에서 그분의 단일한 신성과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뭔가가 일어났음을 발견한다: 거룩한 영에 의해,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atoning sacrifice) 안에서 그분과의 살아 있는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용서 받았고 죄책으로 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다. 또한 바로 그와 똑같은 순간에, 우리 안의 죄악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일이 시작되었다. 칼빈이 늘 지적했듯이,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를 소유함 없이 칭의 만을 위해 그리스도를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을 조각내는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그분은 두 가지 모두를 위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고전 1:30) 모두가 되시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로 연합시키신다. 그러므로, 의롭게 된 죄인은 또한 동시에 그의 죽으심 안에서 죄에 대한 지배와 그의 부활하심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새 생명을 공유한다(롬 6:2-4). 이외에 다른 신학을 견지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으로 이끄는 의로움을 통해”(롬 5:21) 어떻게 은혜가 통치하시는지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초월적인 비전이 무조건적인 순종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 길이 아무리 험할 지라도; 사 6:8-13). 또한 이사야의 비전이 천상의 찬가를 들었던 요한의 경험 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은 당연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 4:8); 이 찬가는 끝 없는 경배 속에서 절정에 이른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리고니어 네셔널 컨퍼런스들이 전통적으로 헨델의 “헬렐루야 합창곡”을 부르며 끝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학이다. 그것은 “R.C. 스프로울 티칭 공동체”의 초창기부터 리고니어의 심장 박동이었으며, 50년 동안 다양한 방식들로 표현되어 왔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바로 그 강사진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이 신학, 아니 ‘우리의’ 신학은 우리를 부서진 잔해더미에서 구속을 거쳐 최종적 회복으로 이끌어 주는 거룩한 수리점이 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의 강사진이며 리폼드 신학교 조직 신학 석좌 교수이다. 그는 Maturity를 포함한 다양한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