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일상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신학과 교회
2022년 01월 10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학
2022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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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학
2022년 01월 10일

신학과 일상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바로 지금이 영원히 중요하다” 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청교도 윌리엄 퍼킨스는 신학을 “영원토록 복된 삶의 학문”으로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윌리엄 아메즈는 신학을 “하나님을 위한 삶의 학문”으로 일컬으면서 퍼킨스를 모방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자 기쁨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자, 그것도 좋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과 일상의 관계는 사도 바울의 다음 세 가지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첫째, 빌립보에서. 빌립보 교회에서는 거명된 두 명의 여인들이 공공연한 논쟁을 벌였고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무지하면 용감한 법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였고, 빌립보 교회의 좋은 평판과 증거는 위기에 처했으며, 그 문제를 그냥 덮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바울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끌어 모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신학을 전개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예수는, 아마도 성육신의 비천함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성을 이해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니하셨다”(빌 2:6). 예수는 비록 325년의 니케아 신조가 고백하듯이,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셨고, 피조 되지 않은 독생자,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하나님과 한 본질이셨지만”,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7절). 특히 “비워”라는 단어는 번역하기에 매우 곤란한 신학적인 위험이 큰 용어로서, 많은 역본들이 문자적 번역에 자신이 없어서 완곡한 단어로 번역해 왔다 (예,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KJV). 문제의 본문은 좀 더 자세히 다룰 가치가 있지만, 그 요점 만큼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고 당신과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 가짐을 보여주기 원한다는 것이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4-5절). 성육신이라는 웅장한 교리는 가시적인 겸손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언급된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딛 1;1). 

둘째, 고린도에서. 바울은 한 동안 사도를 사로잡았던 이슈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고통에 대한 자비를 보여줄 것을 갈망한다(고후 8-9장). 관대한 나눔을 독려하기 위해 그는 어떤 자극을 줄 수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나눔은 그들 신앙의 “진정성”을 입증할 것이다(8:8, 24). 어느 순간 바울은 거의 그들의 허영심에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북쪽의 교회들에게 압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9:1-5). 그러나 그의 주요한 논증은 신학적인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8:9). 다시금 성육신 교리는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적용된다.

성경의 명료성 교리는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주 읽고, 잘 읽으며, 그 가르침들을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자라가도록 격려한다.

셋째, 로마에서. 복음의 성질과 윤곽을 스케치하면서 11개의 장을 기록한 후, 바울은 실천적인 경건의 형태를 분명히 한다: 너희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 12:1-2). 로마인들을 향한 바울의 서신인 그 선언문은 실질적인 경건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형제 사랑을 드러내며(9-10절), 게으름을 제거하고(11절), 환난 중에 인내하며(12절), 환대를 실천할 때에 성도들의 필요에 기여하고(13절), 자만심으로 인해 부풀어 오르는 공작의 깃털 같은 교만을 막고(16절), 명예로운 일을 하며(17절), 되도록 이웃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고(18절),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19-20절), 보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불친절한 행동에 반응하는 것이다(21절). 이보다 더 실천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그의 구세주 안에서 보았던 지혜를 연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신학은 어떻게 실천적인가? 일상에 관한 포괄적인 적용 범위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잘 생각해 보라. 거룩에 관한 예수님의 관점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성화는 단지 우리의 마음이 아닌 몸 안에서 일어난다. 예수님은 눈과 손, 발과 입술에 대해 말씀하신다. 요점은 우리가 죄를 짓기 위해서든 거룩을 표현하기 위해서든 우리의 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욕에 대해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는데 사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의 오른 눈을 뽑고 (혹은) 오른 손을 잘라내 버려야 한다고 제안하신다.   

당신에게 걱정거리가 있는가?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시사할 정도로 하루 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정원에 매일 날아드는 새들을 살펴 보라. 그것들은 건강하고 강건해 보인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돌보신다. 당신은 그분께 그것들보다 더 귀하다(마 6:25-34).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죄를 보는 것을 즐기며 심지어 그것을 과장할 정도로 당신은 비판적인가? 스스로에게 말해보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도 똑같았을 것이다”(참고, 마 7:1-6).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른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우하라. 황금률에 따라 살아가라(12절). 

인도하심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예수님은 약속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들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들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열릴 것이다”(8절). 시 23편이 약속하는 것처럼, “그분이 나를 인도하신다”(2절). 그 동사는 우리의 목자-왕이신 하늘 아버지가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한 평생 행하기 위해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지혜와 분별을 주실 것임을 시사한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언약은 그 말씀이 그분을 묶는 끈과 같은 것임을 보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3절). 그분은 우리를 결코 부적절한 행위나 죄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분께 지혜를 구하지도 않으며, 혹은 최고보다 못한 선택들에 굴복함으로써 찾아오는 것들이다. 

명료함과 섭리   

신학은 얼마나 실천적일 수 있을까? 두 가지 교리들을 생각해 보라. 명료성과 섭리. 

명료성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바른 수단들(설교, 성경공부 자료, 멘토들, 주석들 그리고 리고니어의 <테이블톡>)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위해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는 진리들”에 대한 “충분한” (비록 포괄적이지는 않지만)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 이 요점은, 물론, 대체로 성경이 구하기 어렵고, 오직 사제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덫에 빠진 채, 대중들을 교황과 교회 권위의 속박에 묶어두기 위한 하나의 책략으로만 사용되던 중세 교회 안에서 논쟁이 되었다. 성경의 명료성 교리는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주 읽고, 잘 읽으며, 그 가르침들을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자라가도록 격려한다. 그것은 누가에 의해 묘사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던”(행 17:11) 고상한 베뢰아 신자들과 같이 되라고 우리를 가리치는 교리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기독교 진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위대하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행동들과 기타 모든 일들을 크건 작건 간에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에 의하여 유지하며, 지도하시며, 처리하시며, 다스리신다. 그가 이처럼 섭리 하시되, 그의 오류 없는 예지와 자유롭고 동요 없는 그의 임의적 계획대로 하신다. 그것은 결국 그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을 찬송케 하려는 것이다(5.1)

신앙 고백의 섭리에 관한 장은 다소 어려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예를 들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가 갖는 특질과 자유 의지 및 악과의 관계). 그러나 이 교리의 기본적인 목표는 그 어떤 것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식대로 일어나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시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섭리에 관한 이러한 정의는 로마서 8:28에서 바울 한 진술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첫째 아이를 잃은 한 엄마에게, 악성 종양을 알게 된 누이 동생, 첫 번째 일자리 인터뷰에 실패한 한 대학 졸업생 그리고 수 천여 개의 다른 상황들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는 비록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들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러하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기억 매체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그 사실이 진정으로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의 폭풍 속에서 고요함과 평온함을 넘치도록 가져다 주는 교리이다. 이보다 더 실천적일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신학자들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과연 좋은 신학자들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 적용하고 있는가?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데릭 토마스
데릭 토마스
데릭 토마스(Derek W.H. Thomas) 박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콜롬비아에 있는 제일장로교회 담임 목사이며, 리폼드 신학교 조직 신학 및 목회 신학 분과 석좌 교수이다. 그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강사이며, How the Gospel Brings Us All the Way Home을 포함한 여러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