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토기 그릇들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선택하는 사랑
2022년 11월 03일
이단의 정체 드러내기
2022년 11월 09일
선택하는 사랑
2022년 11월 03일
이단의 정체 드러내기
2022년 11월 09일

하나님의 토기 그릇들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모든 것을 기쁨으로 여김: 3세기의 그리스도 행전”의 첫 번째 글입니다.

근대적 사안들과 역사적 수정주의의 수용을 위해 엄격하게 왜곡된 교부를 한 사람만 꼽는다면 그건 바로 3세기의 변증가 터툴리안이다.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터툴리안 (Quintus Septimus Florens Tertullian)이라는 본명을 가진 터툴리안은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기원후 160년부터 220년까지 살았다. 중년기에 회심한 터툴리안은 숙련된 변호사로, 자신의 기술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수호했다.

두 개의 인용문이 종종 터툴리안을 설명한다. 첫 번째 인용문은 그 진위가 명백하지만, 두 번째 인용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첫 번째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철학을 가르치는) 아테네 학당과 교회 사이에 어떠한 합의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수사적이며, 이에 대한 답변 역시 확실히 부정적일 것이라고 예상된다. 터툴리안은 사변적 철학과 비교하여 사도적 계시의 우월성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아테네 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평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 수호에 가담할 때면 결코 비난을 가하지 않았다. 터툴리안은 그 당시의 이단들, 특히 그중에서도 영지주의자들과 지적 전투를 벌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신비적이고 사색적 원리들로 성경의 계시를 대체하면서도, 때로는 사도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지지해 준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이레네우스와 공조하여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 모두를 변호했다. 

두 번째 인용은, 확실하진 않지만, 여전히 터툴리안의 말로 여겨진다. 바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ad absurdum).”라는 인용문이다.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음을 이유로 믿어 보겠다는 일종의 미덕이 있다는 발상이다. 이 신념은 실존주의적 비이성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열렬히 환영받는다. 모순의 양극을 모두 받아들일 의지가 있기 전까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칼 바르트를 필두로 20세기의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전통은 비이성을 예찬했다. 바르트의 지지자인 에밀 브루너는 이러한 모순이 진리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신학자들은 합리주의를 혐오했고, 합리성은 내버렸다.

신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성과는 구별되는 믿음만이 기독교 진리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는 신앙 주의를 양산한다. 신앙 주의자들은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근거의 사용을 회의적으로 본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성적”이라는 것은 헬라 이교도적 사고를 하는 가짜 기독교인, 또는 반기독교인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심지어 현대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비이성주의로 가까워지는 추세를 발견할 수 있다. 일부 “개혁주의” 학자들은 실제로 비 모순적 율법이 하나님의 생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경에 대한 모든 신뢰를 파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에서는 동일 시간과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도, 혹은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리를 혐오하는 이러한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터툴리안은 영웅과도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단 처방론』을 비롯한 그의 여러 작품을 살펴보면, 터툴리안이 결코 이성에 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터툴리안의 인용문은 참된 것도 죄에 의해 어두워진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성경적 사고에 대한 암시이다. 또한 터툴리안은 이교도 철학자들에 의해 이해되고, 옹호되는 특정 진리에 대해서는 일반 계시를 기초로 주장을 펼쳤다. 영지주의적 사상에 대한 그의 비평은 문화와 교회 내에서 신영지주의의 재기를 목격하는 오늘날 풍성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오리겐(186-255) 역시 터툴리안과 같은 3세기 변증가였다. 그의 사역은 대부분 헬레니즘 유대교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펼쳐졌다. 이집트 지성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변증가 클레멘트와 같은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산한 곳이다.

오리겐은 이마 한 가운데 곱슬머리가 살짝 내려온, 마치 이야기 속 작은 꼬마 아이와 같았다. 좋을 때는 한 없이 좋고, 나쁠 때는 정말 진저리나는 사람이었다. 오리겐이라는 인물에서 우리는 다른 초대 교부들을 특징짓는 여러 장단점을 모두 찾을 수 있다. 후기 사도 시대 동안, 교회는 사도들이 지닌 거대한 능력을 상실했다. 그 시기에는,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하고 누적된 통찰력도 없었으며, 어거스틴과 같은 천재성도 누리지 못했다.

오리겐의 업적 중에는 철학자 켈수스에게 전한 변증적 답변과 성경의 신성한 영감에 대한 변호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리겐이 성경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빈약했다. 오리겐은 성경을 옹호하고자 비유적 성경 해석 방식을 성급히 사용했다. 그리고 이 해석 방식은 앞으로 다가올 수 세기 동안 성경에 대한 교회의 바른 이해에 해를 끼쳤다.

성경에 대한 오리겐의 비유적 접근의 모순은 그가 경솔하게 자신을 거세한 행동에서 발견된다. 남녀 모두가 참석한 그의 강의에서 어떠한 성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결정한 행동이다. 그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마 19: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보지 않고 철저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행동이 오리겐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유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리겐은 향후 몇 년에 걸쳐 데메트리오스 주교로부터 공격을 받아 그의 삶은 무척 비참하게 되었다.

오리겐은 헬라 철학의 관점으로 영혼선재설을 수용했고, 보편구원론을 가르쳤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했고,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서도 결함이 있었다(물론, 그 시대의 교회가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 여전히 고심 중이었고, 확정된 이해가 부족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그의 글은 매우 귀한 작품으로 후대에 전해져 내려왔다. 또한 순교에 대한 그의 가르침 역시 소중하게 전해진다. 오리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함으로 그의 인생을 가장 고결하게 마치길 소망했으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순교가 아닌 자연사로 생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오리겐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기간 동안 고문을 받고 지하 감옥에 수감되는 등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향한 오리겐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우리는 3세기 기독교 경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R.C.스프로울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창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Sanford)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초대 설교 및 강도 목사였고,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는 을 포함하여 백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