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정체 드러내기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하나님의 토기 그릇들
2022년 11월 05일
세상 밖으로
2022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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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정체 드러내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모든 것을 기쁨으로 여김: 3세기의 그리스도 행전”의 두 번째 글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 우리에게 용어 사전을 주셨다면 우리의 선배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고 고통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성경에 제기하는 모든 다루기 힘든 질문에 적절한 개요와 완전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답변이 이루어진 조직 신학이 아니다. 성경은 어떤 면에서 이해하기 쉬운 책이 아니다.

성경이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진정으로 계시하셨다. 하지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려고 의도하지는 않으셨다. 둘째, 이것은 앞의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적 상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자신을 은혜롭게 낮추셨다. 하지만 유한한 언어로 무한한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셋째, 구속받은 자들의 지성은 우리의 모든 기관들에 달라붙어 있는 죄의 잔재로 인해 손상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부활에서 새 몸을 받을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다. 넷째, 마귀와 그의 무리는 진리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과 감정을 왜곡하고 우리의 의지를 그릇 인도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페이지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성령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구주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진리 중 하나는 신격의 삼위일체적 본질이다. 그러나 이 이해는 기독교가 서 있는 토대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그분은 구속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삼위일체 사역(구속하시는 성부, 값을 주고 사시는 성자, 내주하심으로 적용하시는 성령; 엡 1:3 ~ 14)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요 1:1) 또한 복음 메시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합리적 일관성을 가진 사람이 신명기 6:4절의 진리(“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와 하나님이 삼위라는 진리(마 28:19, 고후 13:14)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성, 즉 유일성과 삼위성을 확증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표현할 수 있는가? 초대교회가 씨름했던 쟁점으로 말해보자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또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이것은 쉬운 질문이 아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는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7:2, 19:3)과 같은 말로 그리스도를 언급했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대략 160-225)은 신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나는 어디에서나 세 분의 일관되고 분리할 수 없는 (위격) 안에 하나의 유일한 본질을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시는 분은 그 명령을 실행하는 분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 Against Praxeas, 12).

교회 밖의 비판자(명백한 난제를 사용하여 교회의 신뢰성을 공격했던)와 교회 내의 교사들(진리를 변호하면서 오류를 가르쳤던)에 의해 교회를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회(381)로 이끄는 데는 무려 3세기에 걸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이런 모임에서 우리 선조들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진술하는 잘못된 방식을 제거하고 신조에서 진리를 진술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신격 안에 다양성과 단일성을 설명하려는 두 가지 잘못된 시도의 출현이 문제를 해결로 이끌었다. 하나는 양자론(adoptionism) 또는 역동적 단일 군주신론(dynamic monarchism)(터툴리안이 만든 이 용어는 하나님의 단일성, 즉 하나님은 한 분임을 가리킨다)으로 부르는 가르침이 있었다. 이 견해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시킴으로써 해결책을 구상했다. 사모소타의 바울(Paul of Samosota)과 후에, 아리우스주의자들, 소시니안주의자들, 기독교계 내의 현재 자유주의 운동의 인물들과 같은 양태론 옹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절대적인 동등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예수님의 독특한 능력, 도덕성, 통찰력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비존재론적 호칭)이라는 칭호를 수여하기로 선택했다고 보았다. 

3세기에 로마의 여러 주교(교황)가 양태론을 받아 들임으로 양태론의 영향은 교회의 안녕에 큰 위험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진리를 보존하려는 시도에서 몇몇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에 관한 다양한 계시를 표현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한 분이며 여러 위격이 아닌 아버지, 아들 또는 성령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형시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터툴리안은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프락세아스의 견해를 요약했다.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은 완전히 동일한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프락세아스를 반대하여 Against Praxeas, 2)

그 이름이 양태론과 실질적으로 동일시된 사람은 펜타폴리스의 사벨리우스(Sabellius of Pentapolis)였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사벨리우스를 비난했다. “성자는 성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부는 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부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성부이시다. 또한 성령도 성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독생하신 분은 한 분이다. 하지만 그분은 존재하는 그대로의 아들이시다. 이 세분이 하나의 신격이다. 또한 이 하나의 신격은 속성에서 세 분이다”(신학 연설 Theological Orations, 5.9).

주후 269년 안디옥 공의회(the Synod of Antioch)에서 정죄 받은 이런 양자론적 입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깎아내림으로써 신격의 단일성을 보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양태론적 견해는 신격 안에 있는 위격의 구별성을 파괴함으로써 신격의 단일성을 과장하여 진술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4세기 초에 끝났다. 기독교의 수호와 제국의 평온이 매우 중요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Emperor Constantine)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역사상 첫 번째 대공의회를 소집했다.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니케아에 모인 주교들에게서 세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양자론을 두려워했던 사람들, 양태론을 두려워했던 사람들, 그리고 쟁점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대다수의 사람이었다.

325년의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이런 격렬한 갈등을 끝내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니케아 신조가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치명타를 입힌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양태론의 오류를 허용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 논쟁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주후 381년)까지 수십 년 동안 교회에서 계속되었다. 이곳에서 성직자들이 신중하게 만든 정의를 통해 세 분의 신성한 위격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해명되었다. 신격은 본질에서 하나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르는 특성들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천명되었다. 더욱이, 구별되는 세 위격은 이런 공통된 속성을 공유하고 이런 속성은 동등하게 공유된다. 따라서 신격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이루졌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양태론적 설명은 4세기에 교회가 거부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현대 자유주의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삼위일체를 하나님 의식의 다중 표현으로 설명했다. 그는 신격 안에 구별된 위격의 개념을 거부했다. 오늘날에도 연합 오순절 교회는 신격 안에 세 위격의 존재를 부인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양태론적 접근은 성경을 큰 혼란에 빠트린다. 창세기에서 “우리가…하자(Let us)”와 같은 단계를 사용하는 것은 신격 안에 숫자의 복수성을 나타낸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지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양태론은 하나님을 심각한 조현병 환자로 만든다. 하지만 성경의 이런 구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 신격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위격이 있음을 믿게 된다. 성경에 대한 이런 이해는 초대 교회 교부들의 귀중한 유산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존 D. 한나
존 D. 한나
존 D. 한나 박사(Dr. John D. Hannah)는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 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 연구 교수이자 저명한 역사 신학 교수이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How Do We Glorify God?)를 포함해서 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