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22년 11월 29일한 글자 차이
2022년 12월 06일중요한 시대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결정적 시대: 4세기 교회사”의 네 번째 글입니다.
놀라운 세기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의 “순교자 시대”로 시작된 것이 제국 내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출현으로 끝났다. 교회의 운명은 소외되고 핍박받는 자들의 영역에서 승자의 영역으로, 법적 지위가 없는 상태에서 종교적 지배의 자리로 빠르게 이동했다. 따라서 서방 세계의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는 1400년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승리
제국이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가 개혁에 착수했다. 독재자들은 종종 역사 속에서 대중의 욕구에 호응하는 해방자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이것은 사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을 높이고 자신을 반신적인 통치자((半神, semi divine ruler)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 군주제를 만들었다. 로마 제국이 지리적으로 확장되고 안전하게 됨에 따라 그의 조직적 재능은 유익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303년에 그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했다. 그는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 서적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을 박해했다. 305년에 투옥, 고문, 죽음의 박해가 성직자들을 둬덮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교회는 공적 유용성의 기관으로 인식되었다. 박해의 시기에 자행되었던 기독교인의 재산 파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성직자들은 개인적으로 법적 소송을 할 수 있도록 세금 감면과 사법적 권한을 받았다. 황제 숭배는 중단되었고 신들은 주화에서 사라졌다. 또한 관리들이 이교 의식을 주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 사원을 파괴하고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도시에 상을 주었으며 검투사 시합을 금지했다.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만든 기독교 달력이 채택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설명
국가의 지원을 통해 교회가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시대에 강력한 주교들이 등장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루었던 조직적 발전 중 제국을 12개 교구로 분할하는 것과 같은 많은 부분이 교회에 도입되어 정부 구조에 복합성과 효율성이 더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음악과 이상적인 수도원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뛰어난 웅변 실력으로 유명한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n, 340-97)와 같은 강력한 주교들이 이 세기에 나타났다. 암브로시우스는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데살로니가에서 자행한 이교도 박해를 정죄하고(390) 그를 파문했다. 제롬(340-420)은 뛰어난 성경 학자이자 수도사였다(그는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로마의 다마스쿠스 주교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원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 성경이 중세 성서인 라틴어 불가타(Vulgate) 성경이다. 한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5~407)은 유창한 설교자이자 도덕 개혁가였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해설자로 불렸다. 가이사랴의 주교인 유세비우스(Eusebius, 대략 263–340)는 온건한 아리우스주의 견해에 오염되었지만 학자이자 성직자였다. 그가 저술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는 초기 몇 세기의 교회에 관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한 주요 원천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교회 역사가”라는 칭호를 가져다주었다. 예루살렘의 키릴(Cyril of Jerusalem, 대략 315~86)은 저명한 목사, 작가, 교리 교사였다.
제국 안에서 교회의 새로운 위상으로 인한 가장 중요한 유익 가운데 하나는 이전 세기보다 더 광범위한 기반에서 신학적 쟁점을 논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황제는 제국의 평온을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제국 전역의 주교들이 난해한 문제를 논의하고 답을 공식화하기 위해 모일 수 있었다. 학자들은 “에큐메니칼 시대”에 관해 말한다. 이 시대는 쟁점을 해결하고 신조를 공식화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주교들이 여러 번 모였던 시대였다. 그 결과, 성직자들이 정통 신앙을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신앙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방식으로 신앙을 설명하였다.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자 황제는 기독교의 번영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종교 문제가 국가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세기를 지배했던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었는데, 이 쟁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성직자들은 얼마 동안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교회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신뢰할 만하게 선포하면서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라고 선포할 수 있었는가? 신성을 구세주에게 확장함으로 일신론(monotheism)이 위협받는 것처럼 보였다.
4세기에 어떤 장로가 성부와 성자의 절대적 동등성을 부정함으로써 그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을 때 해결을 위한 무대가 준비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250-336년경)는 주교와 충돌했다. 그는 321년 지방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았지만 그의 견해는 주교들을 분열시키고 콘스탄티누스가 다져 놓았던 세계의 조화를 위협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아직 완성되지 않은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여름 별장)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칼 또는 전 세계적인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황제는 최근 지목된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주교 아타나시우스(대략 296-373년)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것은 공의회의 결론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리우스는 양태론(아리우스가 생각하기에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하는 입장)을 피하고자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부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버지가 아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부인했다(아리우스가 옹호하고 있다고 아타나시우스가 비난했던 입장). 300명이 넘는 주교들이 모여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했다. 그중에서도 아타나시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와 한 본질에 속하는”이라는 구절이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갈등은, 어떤 면에서 언어적 차이의 결과였다. 서방 교회는 “위격(person)”과 “실재(substance)”라는 용어를 구별했다. 1세기 전에 터툴리안(Tertullian)이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은 두 위격과 한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동방 교회는 이런 용어를 동의어로 보았고 서방 교회가 양태론을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아리우스의 양자론적 견해(구주의 영원성을 희생시키면서 구주의 신성을 확증하는 견해)에 대한 지지가 급증했다.
언어적 혼란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세 명의 갑바도기아 교부(가이사랴의 바질(Basil of Caesarea, 대략 329-379),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29-390),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0-395)의 기념비적 작업이 두 번째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이끌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381)한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확증하고 확장했다. “실재”와 “위격”이라는 용어를 구별했다. 실재라는 용어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게 공유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며 위격이라는 용어는 종류가 아니라 역할에서 구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가리킨다. 신격(Godhead) 내의 구별은 피조물의 구속과 관련이 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의의 필연적 결과는 성령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대한 지배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즉 “완전한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어떻게 우리에게 신적 구속, 즉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성령에 관한 질문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었다. 삼위일체를 올바로 말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즉 위대하신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천 년 이상 동안 기독교 교회에서 도전 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것은 4세기 교회가 이루었던 최고의 업적이었다. 주교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다는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교회가 항상 고백하는 것의 핵심적인 설명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공의회는 또한 5세기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해결할 쟁점을 다루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는 성육신 이전의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 문제와 관련 있는 쟁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을 때 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쟁점을 설명하기 위한 투쟁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최종적인 설명은 나중에 왔다.
라오디게아의 주교인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대략 310-90)는 그리스도가 영원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언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그의 인성을 깎아 내렸다.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성은 인성이 부재한 곳에 거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셨지만 참 사람은 아니었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정죄되었다. 그것은 아리우스의 견해만큼이나 파괴적인 것이었다.
영원성과 변화
21세기 시민으로서 이런 4세기 상황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무서운 박해를 견디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즐거운 순간에 임재하시는 것만큼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우리의 주권자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비극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그분은 위대한 불변의 계획을 실행하고 계신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분노가 이교도의 죽어가는 숨소리였고 교회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겉모습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연속성을 제공하는 변함없는 요소가 이 4세기 안에 있다. 공통점은 사도들의 교리의 뜻을 정확히 하고 옹호하려는 교회의 열정이다.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편안한 환경에 놓였을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하신 구세주의 아름다움 같은 교회가 선포한 경이로운 점들을 즉시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죄인을 대신해서 그의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영원하고 공의로운 진노의 빚을 갚은 분이 이루신 죄로부터의 구속이라는 좋은 소식이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것을 하실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위대한 심판자가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셨다. 하지만 인간만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었고 스스로 완전해야 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의 중심 또는 관심은 항상 그리스도와 그분의 자비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런 모범을 보여준 이 놀라운 세기의 남성과 여성,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빚을 졌다.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21세기에 교회의 중심이 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