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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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결정적 시대: 4세기 교회사”의 세 번째 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요한복음의 서문은 기독교 역사의 처음 3세기 동안에 가장 면밀히 검토된 신약 성경 구절이다. 초대 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이슈와 질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해만큼 더 첨예한 문제는 없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즉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행하셨으며, 어디서 오셨고 어디로 가셨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초대 교회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질문도 없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요한이 가진 로고스에 대한 이해에 주목하게 만든다. “말씀”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로고스는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심오한 주제이다.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구별하여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요한은 로고스에 대한 두 가지 주장 사이에서 숨을 돌릴 틈도 없는 엄청난 모순에 빠진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다른 대상과 함께 있다고 말할 때, 이는 일반적으로 그 둘 사이의 구별을 시사한다. 같음과 다름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 가지가 동일하다고 주장할 때는 이 둘 사이의 차이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요한은 로고스와 하나님을 구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로고스를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이것이 모순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자와 보수주의 신학자 모두 이러한 모순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시대를 살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학적 온전함을 계속 유지하려면, 요한의 주장이 사실은 모순적이라는 사고를 거부해야 한다. 과거 개혁주의에 몸 담고 떠난 이들의 주장처럼, 진짜 모순도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근래에 유행하는 대중적이지만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합리주의는 우리에게 비합리적인 성경과 비합리적인 신학으로 비합리적인 하나님을 선사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비합리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처방안이 합리주의라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합리적이기 위해 합리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허무맹랑함으로의 도피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기쁘게 할 수 있지만, 진리의 성령은 모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처럼)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음을 호소하며 요한복음의 갈등 해결을 위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본문을 번역할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정쩡한 시도는 다신론을 양산할 뿐이다.

이러한 유형의 의문은 교회의 처음 3세기 동안 기독론을 형성하기 위한 검토와 증명을 재촉했다. 4세기에 이르고, 분수령을 이룬 니케아 신조는 마치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나가 튀어나오듯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4세기에 성문화된 삼위일체 교리 역시 그 당시에 탄생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1세기 동안 성경이 다진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작부터 유일신론이 문제가 되었고, 단일신론의 개념이 논의되었다. 우리는 보통 나비와 통치자와 관련하여 왕 또는 군주(monarch 또는 monarchy)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접두사와 어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군주라는 단어의 어원인 “arch”는 요한복음 1장에서 등장한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태초에”에서 태초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archè“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최고위자”, 또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영어에도 대천사(archangels), 대적(arch-enemies), 설계자(architect), 대주교(archbishops) 등의 단어들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들에서 “archè“는 “최고위자,” 또는 “통치자”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군주란 그에게 주어진 영역을 다스리는 (일반적으로는 왕이나 왕비와 같은) 단일 통치자를 가리킨다. 

초대 교회 처음 몇 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며 유일신론의 개념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하지만 3세기를 지나 4세기에 이르면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면서 동시에 유일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위기가 찾아왔다. 

3세기는 다양한 형태의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커다란 공격을 가했다. 특히, 영지주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이라 불리는 다른 종류의 단일신론을 양산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식(mode)”이라는 표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방식은 주어진 존재의 정도 또는 표명이다. 영지주의자들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은 하나님이 절대적인 실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존재가 그분의 중심에서 내뿜어지거나 발산한다. 각각의 발산은 하나님의 존재 단계 또는 정도를 나타내는데, 신성한 하나님 존재의 핵심에서 멀어질수록 완전함에서는 멀어진다고 믿었다. 

이단자 사벨리우스가 이러한 개념을 가르쳤다. 그는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태양과 햇빛의 관계와 비교했다. 햇빛은 태양과 동일한 본질 또는 동일한 실재이나, 여전히 태양과는 구별된다. 현대 용어로, 태양이 지구로부터 1억 5천만km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태양 광선으로 인해 우리는 따뜻함을 느낀다. 사벨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homo-ousios)”이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하다고 주장했다. 사벨리우스와 그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267년 안디옥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로고스에 대해 “유사한 본질(Homoi-ousios)”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개념은 아버지와 구별되는 로고스가 그분의 신적 존재를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하게”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타도한 직후로, 새로우면서 더욱 치명적인 형태의 단일신론이 등장했다. 역설적으로 새로운 단일신론의 발상지는 사벨리우스를 단죄한 장소였던 안디옥이었다. 이 이단 사상은 “역동적 단일신론” 또는 “양자설”이라고 불렸다. 안디옥의 루키안과 사모사타의 바울 등은 이 사상의 대표 주자인 아리우스를 만들어냈다. 325년에 있었던 중대한 니케아 회의와 니케아 신조를 유발한 이들이 바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이 내용은 테이블톡의 다른 글들에서도 다룰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짧게나마 언급하려는 바는 아리우스가 로고스의 영원한 신성을 부정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역설적으로 정통주의자들의 표현인 “유사한 본질(Homoi-ousios)”에 호소했다. 로고스는 단지 하나님과 “유사”하며, 그가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를 포함한 대부분 이단자는 정통주의적 표현들로 자신의 이단 사상을 포장했다. 아리우스파의 위협이 너무 강력했기에, 교회가 로고스와 성부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사용한 표현을 뒤집어야 할 정도였다. 3세기 사벨리우스와의 논쟁에서 부정되었던 표현인 “동일한 본질(homo-ousios)”이 이제는 정통주의 개념으로 승격되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다고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실재, 동일하게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동일한 본질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단어 선택이 갖는 의미는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아리우스파의 위협을 받았으며, 그 앞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한 교회의 고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4세기 기독교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R.C.스프로울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창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Sanford)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초대 설교 및 강도 목사였고,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는 을 포함하여 백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