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차이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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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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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차이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결정적 시대: 4세기 교회사”의 다섯 번째 글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요 10:30)라는 사실을 확정하셨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라고 말씀하셨다. 두 말씀을 하나의 진리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이것 외에도 많은 질문거리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아신다고 이야기하시면서도 (막 13:32), 나무에 숨어 있던 “알려지지 않고” 호기심 많던 죄인(삭개오)에게는 점심을 함께하자고 말씀하셨다. 

오늘 살펴보는 말씀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긴장 관계가 있다. 이러한 긴장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 큰 쟁점을 다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친구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베드로에게도 걸어보라고 명하신 신적인 존재가 어떻게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며 치욕적인 죽음을 맞을 수 있는가?”라는 쟁점이다. 

예수님은 진실로 신인이시다. 그러나 신과 인간,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부활은 이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마리아는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발을 붙잡았다.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남아있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었다. 밤새 물고기를 못 잡고 침울해하던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생선을 구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힌 벽을 그대로 통과 하셨으며, 제자들과의 대화 후에는 홀연히 사라지셨다. (유령이 아닌)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때에도 많은 사람에게 보이시고는 인간의 몸으로 승천하셨으며, 지금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러한 성경 본문과 다른 성경의 말씀들은 초대 교회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칠 것을 가르친다. 2 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히 4:14-15)”하시는 참 인간이 되신 위대한 대제사장을 한목소리로 찬양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리아에게 나신 나사렛의 예수가 바로 “주”라고 고백한다. 

동일한 찬양을 부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처음 4세기 동안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의 세상과는 다르다. 우리는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 적어도 이곳 미국에서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가지고 정부 관리들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지는 않는다. 다행히도,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반기독교적 법령을 폐지하고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멈추었다. 그러면서, 교회는 (앞서 말한) 난해하고, 모순적이지만 여전히 성경적인, 진리들에 대해 고민할 시간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우리의 연구를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빌 2:7)”를 가지셨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고 고백하는 요한의 가르침을 교회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교회는 신과 인간이 어떻게 하나 되는 것이 가능한지 밝혀야 했다. 이러한 질문들은 4세기에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를 통해 해결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소집

교회에서 흔히 그렇듯이, 어려운 문제들로 인해 논쟁이 일어났다. 중요 인물들이 각기 다른 신학적 입장을 취했는데, 특별히 한 편에는 아리우스라는 신학자가 포진했다. 그에게 있어서 특정 성경 주제들은 매우 중요했다. 예를 들어보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쉐마”라고 통칭하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암기되었다. 이는 바르고 참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주가 “한 분”이시라면, 예수님은 이 공식에 어떻게 들어맞을 수 있을까? 아리우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성육신으로 나사렛 예수가 신인이 되셨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표현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을 때 신인이 되셨다.

그러나, 이처럼 바른 표현 뒤에 숨은 것은 고약한 발상으로 차고 넘친 쓰레기통이다. 오늘날의 정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신인이 되셨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이와 함께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예수님의 출생 이전에도 완전한 신성으로 존재했다는 점에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우스에게는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이 문제였다. 그는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 정통주의의 영웅인 아타나시우스가 경종을 울린다. 아리우스 추종자들의 문제점을 분명하고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성부와 달리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거부했다. 이는 이단이다.

그럼에도 아리우스의 입장은 이해하기가 쉬웠다. 성경적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주장이었지만 매우 잘못됐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논쟁은 제국 전역에서 우렛소리와 같이 번져갔다. 그리고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규모 종교 회의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많은 논쟁 속에서 325년 니케아 회의로 모인 신학자들은 심사숙고를 거치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적(preexistent) 신성 개념을 확립했다. 이러한 교리 확립으로 인해 아리우스주의자들은 교회에서 축출되었다.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음이 선언되었다. “하나의 본질” 또는 “동일한 본질”은 헬라어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이다. 호모우시오스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인데, 많은 사람이 아는 것처럼 “호모(homo)”는 “같다”는 의미이며, “우시아(ousia)”는 “본질”이다. 

325년 이후

첫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반이 세워졌다. 바른 신학적 입장이 세워졌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신학자들에 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공적으로 정죄받고, 아타나시우스가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뒀지만, 모든 사람이 정통주의의 입장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325년 이후의 논쟁은 사람이 아닌 언어 사용에 있었다.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고수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표현인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를 알리려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었다. 이 단어들을 처음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철자법의 차이조차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이점은 두 번째 단어에 “i”가 추가된 것이다.

이 소문자 “i”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교수인 내가 어느 학생이 제출한 우수한 과제에 “A” 학점을 주려다가 실수로 한 줄라도 빠트렸다면, 그 내용의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A” 학점이 “F” 학점으로 바뀔 수도 있다. 신학생들이 아주 작은 선 하나에 민감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작은 “i”에도 민감해질 수 있다. 호모우시오스(homoousios)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는 예수님이 “유사한 본질”이라고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의 “본질” 또는 “실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그 본질 자체이거나, 본질이 아닌 무언가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과”는 다른 “사과”와 “비슷한” 사과가 될 수가 있다. 색깔과 맛이 각기 다른 두 개의 사과는 여전히 “사과”다. 이 두 개의 사과가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더 달거나 덜 달거나, 혹은 빨간 사과이거나 초록 사과일 수 있다. 그러나 사과는 여전히 “사과”이며, 햄샌드위치의 맛을 내거나, 코끼리 같은 모양을 낼 수는 없다. “사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춰야만 한다. 본질적으로 “사과”이어야만 한다. 사과가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이다. 

상당한 논쟁 끝에, 신학자들은 의견을 일치했다. 신성 또는 인성의 본질에 관해서, “거의” 신과 같다거나 “일부만” 사람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의 일치였다.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하고, 사람은 사람 자체여야 한다. 모든 신학자는 (“i”를 포함한)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를 배격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본질에 있어서 “유사”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의견을 거둬들이고 정통주의의 입장을 확증했다.

그러나,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일부 말썽꾼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성육신 사상에 무릎 꿇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의 본성이 아버지와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극단적인 입장이었다. 심지어 이전에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옛 대적들(호모우시오스)과 함께 “서로 다르다”를 주장하는 새로운 대적에게 맞섰다. 이러한 논쟁을 끝내고자 또 다른 공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회의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시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신조가 완전히 다듬어졌고, 이 신조를 우리는 “니케아 신조”라고 부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지혜롭게도, 칼케돈 신조(451년)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는지에 대한 신비를 철저하게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다는 두 가지의 경계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신학적 고민의 여지까지도 확고히 남겨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두 본성 사이에서 잘못된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서는 경고했다.

그리스도의 하나 되고, 통일된 인격에는 두 가지의 본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확고한 자각을 갖고 계셨다. 칼케돈 신조는 성육신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구분이 영원토록 계속된다고 확증했다. 이 두 본성은 혼돈되거나 변하지 않고,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는 동시에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스도의 의지에 있어서는, 신성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각각의 본성에 남아있다. 신인이신 그리스도는 두 본성으로 하나이시면서 이 두 본성이 서로 관통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 사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영광스러운 교리와 관련하여 첨언하자면, 4세기 신학자들의 고된 수고로 우리는 지금의 신학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리처드 갬블
리처드 갬블
리처드 갬블 박사는 개혁 장로교 신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이다. 갬블 박사는 존 칼빈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많은 글을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