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 논쟁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살아있는 권위
2022년 12월 15일
은총의 박사, 어거스틴
2022년 12월 29일
살아있는 권위
2022년 12월 15일
은총의 박사, 어거스틴
2022년 12월 29일

펠라기우스 논쟁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한 시대의 끝: 5세기 교회사”의 두 번째 글입니다.

“주께서 명하신 것을 허락하시고, 주께서 뜻하시는 바를 명하시옵소서.” 히포의 성 어거스틴의 펜에서 나온 이 구절은 위대한 신학자의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은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이자 5세기 초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이름의 영국 수도사는 이런 도발적인 내용의 기도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했다. 5세기 초 어느날 펠라기우스는 로마에 왔다. 그때 그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과 심지어 성직자들 속에서 도덕적 해이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이런 불편함의 대부분을 성 어거스틴의 가르침 탓으로 돌렸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만 의를 성취할 수 있었다.

“오 하나님, 주께서 명하신 것을 허락하시고, 주께서 뜻하시는 바를 명하시옵소서”라는 어거스틴의 기도에서 펠라기우스는 두 번째 부분에는 어떤 문제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높은 속성은 사실 그분의 의이고 그런 의에서 그분은 자신의 율법에 따라 그분의 피조물에게 의무를 부과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펠라기우스를 괴롭혔던 부분은 이 기도의 첫 부분이었다. 이 기도에서 어거스틴는 하나님께 명령하신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구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든지 명령을 받는 사람은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말함으로써 반응했다. 사람이 순종하기 위해 은혜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논쟁은 아담의 타락의 본질,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인간성의 부패 정도, 그리고 세례 교리에 관한 추가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아담의 죄는 단지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펠라기우스의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범죄는 결과적으로 인류를 구성하는 본질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고 사람은 의로운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창조된 그 상태에서 변경될 수 없다고 믿었다.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은 가능하지만 기본적인 인간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의 기본적인 인간 본성은 언제 어디서나 순종할 수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심지어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모든 인간이 완벽한 의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며 사실 일부는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했다.

펠라기우스는 은혜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혜가 순종에 필요하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은혜가 순종을 ‘촉진’하지만 순종의 필수 전제 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담으로부터 그의 후손에게 죄책이 전가되는 일도 없고 타락의 결과로서 인간의 본성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 아담이 그의 후손에게 미친 유일한 부정적인 영향은 나쁜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아담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불순종을 모방한다면 그들은 그의 죄책을 공유할 것이라고 펠라기우스는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되거나 전가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한편 어거스틴는 타락이 인류의 도덕적 능력을 심각하게 손상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아담의 타락은 모든 인류를 원죄의 파멸적인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첫 번째 죄가 인류에게 미친 결과를 의미한다. 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아담의 모든 후손의 철저한 부패라는 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 주제를 전개한다.

이 논쟁에서 어거스틴의 핵심 쟁점은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능력, 즉 도덕적 능력의 결여라는 문제였다. 어거스틴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도덕적 자유뿐 아니라 자유 의지도 누렸다고 주장했다. 의지는 선택하는 능력이다. 자유는 하나님의 것을 수용할 수 있고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거스틴는 타락 후에도 선택하는 의지나 능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자유롭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그들을 부패한 상태에 있게 하는 죄의 속박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죄의 속박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누렸던 본래의 자유는 상실되었다.

도덕적 자유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역사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갱신은 성경이 “최고의” 자유라고 부르는 것이다(약 2:8).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원죄의 핵심인 도덕적 무능력이라는 문제와 관련 있어야 했다. 이 논쟁은 몇 가지 교회 평결을 낳았다. 이런 평결 가운데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Council of Carthage)가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정죄한 교회의 평결이 포함된다. 이단자 펠라기우스는 429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431년에 에베소 공의회에서 교회는 다시 한번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 정통은 원래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복해서 거부했다.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한 형태를 가르치는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조차도 처음 세 개의 정경-특히 칭의에 관한 6장에서-인간은 은혜 없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대해 예전에 교회가 내린 정죄를 반복한다. 현대 로마 가톨릭 교리서가 나온 최근에도 이런 정죄는 계속된다. 

우리 시대에 펠라기우스주의와 어거스틴주의의 논쟁은 인본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논쟁으로 볼 수도 있다. 인본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케케묵은 변종이다. 하지만 현재 교회 내부의 투쟁은 어거스틴의 견해와 다양한 형태의 반(半)펠라기우스의 견해 사이의 투쟁이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견해 사이에 중간 지점을 찾으려고 애쓴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은혜가 의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은혜가 일방적으로 또는 주권적으로 죄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는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기 전에 개인이 믿음의 첫걸음을 내디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을 찾는 일과 함께 믿음의 은혜를 나누어 주신다. 반펠라기우스주의 자들에겐 약간의 은혜와 행위가 섞인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성경에 충실하고, 교회의 옛 공의회에 충실하려면 어거스틴의 진리를 분별하고 그 진리를 올바르게 옹호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R.C. 스프로울
R.C. 스프로울
R.C.스프로울 박사는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창립자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Sanford)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채플(Saint Andrew's Chapel)의 초대 설교 및 강도 목사였고,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는 을 포함하여 백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