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박사, 어거스틴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펠라기우스 논쟁
2022년 12월 20일
참 하나님, 참 인간: 칼케돈 공의회
2023년 0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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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박사, 어거스틴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한 시대의 끝: 5세기 교회사”의 세 번째 글입니다.

교리와 경건의 조화에 있어서 어거스틴(354-430)과 맞먹을 인물은 교회사에서 찾기 드물다. 어거스틴의 작품들은 기독교 철학, 조직신학, 철학사, 논증법, 수사학, 그리고 기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가 죽은 사람을 위한 중보적 기도와 제사, 연옥, 변형적 칭의의 교리를 어느 정도 지지했다 할지라도, 그의 장대한 은혜 교리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대속 교리는 개혁 신학의 여러 고백서 안에서 정밀하고 튼튼한 기틀로 세워졌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이교 사상이 아닌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명의 재건 역시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라 진행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도 그 당시 무시되었던 어거스틴의 죄와 구원 교리를 재발견하며 쌓아 올린 것이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주 타가스테(Tagaste)에서 354년에 태어났다. 어거스틴은 타락에 있어서, “어린이들의 무죄는 마음의 어떤 상태보다 신체의 무력함에 있다(고백록 1권 7장).”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Partricius)는 이교도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버지를 상스럽고, 호색하며 화를 잘 낼 뿐 아니라 외도를 즐기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파트리시우스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로마가 통제하는 경제, 정치 체제 속에서 아프리카인으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어거스틴은 그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파트리시우스는 어거스틴이 17살이 되기 전에 죽음 맞았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열정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어거스틴을 향한 남다른 사랑을 지닌 모니카는 아들의 행복과 구원을 놓고 끈질긴 열심으로 쉼 없이 기도를 쏟아부었다.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회심과 정통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들었을 때는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의 재능과 섬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태워지는 시점에 어머니 모니카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33살이 되던 해, 그녀는 5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그의 부모는 자신의 학업적 성취에만 치중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영적인 동기가 아닌 그저 아들의 출세를 위한 헛된 야심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학업이 그의 회심을 방해하기보다는 돕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런 확신은 거의 들어맞았다. 

타가스테에서 기초 소양 과정을 마친 어거스틴은 365년부터 369년까지 마다우라(Madaura)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어거스틴은 진리에 대한 적절한 언어적 표현을 찾는 것을 평생의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연구에서는 인간과 언어의 유사점을 드러내며, 매우 기묘하며 본질적으로 선한 인간이 얼마나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했다. 단어와 웅변이가 설득과 설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남용될 때는 오류와 악함을 묘사할 뿐이다. 훗날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의 규칙은 무시하면서, 문자와 음절의 규칙은 얼마나 까다롭게 지키는지도 지적했다. 

후원자 로마니아누스의 도움을 받은 어거스틴은 수사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향했다. 이때가 기원후 370년이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한 여인을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3년간 지속된 이들의 관계로 얻은 결과는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이 주셨다는 의미)였다. 동거 생활로 이끈 정욕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억했다. “진흙탕 같은 정욕과 젊음의 혈기가 내뿜는 뿌연 안개가 내 마음을 덮어 어둡게 하였기 때문에, 백색광 같은 사랑과 안개같이 희뿌연 정욕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었다(고백록 2권 2장).”

어거스틴은 9년 동안 물질주의와 이원론으로 가득 찬 마니교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다. 마니교는 기독교, 불교, 그리고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을 혼합하여 악의 문제를 다루었다. 어거스틴은 겉으로는 자신이 유년 시절에 배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지하면서도, 악의 존재에 대한 마니교의 정교하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에 매료당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묘한 매력을 풍기는 혼합 사상이 언어와 실체 사이의 통합을 위한 그의 탐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 주의자들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이며 터무니없는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이름을 뒤섞으며 말할지라도, 그것은 마귀의 올무였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늘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입에 발린 소리뿐이었다(고백록 3권 6장).”

마니교적 이원론에 대한 숙고는 어거스틴의 신학 중에 가장 심오한 주제 중 하나인 악의 문제를 끌어냈다. 어거스틴의 회심 직후에 기록한 『독백』은 하나님을 “진실로 피난처를 찾아 피신하는 소수에게 악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악은 선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모든 선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악은 단지 선의 부재일 뿐이다. 악은 침범하고 오염시키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차용된 것이며 그 영광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악이 내재한 존재도 그 자체로는 선하다. 마니교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반대 본성을 근절한다고 해서 악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악이란 타락된 것을 정결케 함으로 제거될 수 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참된 것의 모방하지 않는 거짓된 것은 없기 때문에 진리와 거짓은 동일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학업을 마친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곳의 교육 분위기는 실로 가관이었다. “판을 엎는 자들”로 알려진 학생들은 모든 질서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미친 사람처럼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다. 관행으로 보호되지 않았으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어거스틴은 383년에 로마로 갔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어거스틴은 밀란 지역에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직 자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곳에 지원한 어거스틴은 그다음 해인 384년에 밀란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밀란의 위대한 설교자 암브로스를 조우한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의 수사법에서 자신의 마니학 스승이었던 파우스투스의 방식만큼 재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하고 본질적인 실재를 언어에 녹인 암브로스의 설교 능력을 배우게 된다. 어거스틴은 기독교가 마니교에 대항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는 교회의 교리 문답자로 등록했다. 회의주의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신플라톤 철학은 어거스틴을 마니교 주의의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새롭게 성경을 접하면서, 어거스틴이 가진 지적 성장의 빈 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창조, 섭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어거스틴의 지적, 영적 열망을 차고 넘치게 채워주었다. 

어거스틴은 그제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향한 찬양과 사랑을 떠나서는 영혼의 쉼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에 의해 의도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만 “사랑받으셔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만을 찬양하며 즐거워하도록 만드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분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쉼을 누릴 수 없도록 하셨다(고백록 1권 1장)”고 어거스틴은 인지했다. 

31살 된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고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들고 읽어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자기 주변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든 어거스틴의 눈은 성경 말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괴롭힌 불만족, 확신, 재검토의 순환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387년 4월 25일, 암브로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은둔 생활을 원했다. 이전에 따르던 쾌락, 멋, 명예는 멀리하며 무소유를 실천하고, 성경 읽기와 하나님을 묵상하는 삶을 추구했다. 감독이 없는 교회들이 어거스틴을 데려오기 원했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이러한 자리들을 사양했다. 그리고 391년이 되어서 수도원 건립을 목적으로 히포로 이동했다. 히포에는 발레리우스가 감독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 발레리우스는 어거스틴을 사제로 임명하고, 395년경에는 어거스틴이 이 도시의 새로운 감독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을 목사로서 성도들을 섬겼을 뿐 아니라, 기독교 진리와 순전한 예배에 해박한 교회 지도자로서 전체 기독교 세계를 이끌었다. 철학과 신학에 대한 그의 광대한 역량을 쏟아부은 영적 자서전『고백록』은 수많은 신학 의제들을 수립했다. 그리스도, 삼위일체, 인간의 죄, 악의 성향, 타락한 의지의 내적 부패와 자유함,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필요성, 성례의 본질, 타락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되는 인류사의 향방 등의 기본을 『고백록』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명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게 알려주십시오(고백록 10권 29장)”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펠라기우스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어거스틴은 평생 은혜의 필요성을 변증했다. 그리고 이는 그의 가장 심오하면서도 논쟁적인 신학적 입장들을 만들어 냈다. 어거스틴 사상이 지닌 이러한 특징은 안셀무스,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등 수많은 사람의 경건과 신학에 영감을 주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매우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여 칼세돈의 입장을 예견했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전개된 그의 놀라운 신정론은 서구사에 혁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이고 결론을 찾고 있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역동성을 창출해냈다. 또한, 도나투스파의 박해에 대한 그의 변증은 여러 나쁜 결과들을 도출하기도 했지만, 교회의 일치를 위한 그의 강력한 견해는 교리적 토론과 확증을 통해 다양한 유형 속에서 일치를 이루려는 많은 복음주의적 노력에 실체를 부여했다.

1,200여 년 전, 수도승 고트샬크가 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실이다. “사도 시대 이후, 어거스틴은 모든 교회의 선생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토마스 J. 네틀스
토마스 J. 네틀스
토마스 J. 네틀스(Thomas J. Nettles) 박사는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의 역사 신학 교수이다.